시간이 지나도 관계는 언제나 흔들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마음이 맞닿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조차 누군가는 이미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우는 요즘 그걸, 매일 실감하고 있었다.
수진과 다시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우는 자신이 그만큼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진은 여전히 자주 웃었다.
늘 그렇듯 말이 많았고, 정우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정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예전과 달랐다.
조용한 배려가 아니라, 무언가를 억누르는 고통의 침묵이었다.
수진은 그걸 느꼈다.
“너 요즘 이상해. 예전엔 말이 없어도 그게 편했는데…
요즘엔, 뭔가 말을 안 하고 있는 것 같아.”
정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냥… 일이 좀 많아서 그래.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수진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더 묻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정우는 수진을 한 자리에 불렀다.
출판사 거래처 사람들과의 조촐한 술자리였다.
그 자리에 정우의 대학 선배이자 의사인 지후가 동석했다.
지후는 깔끔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말수는 많지 않았지만 질문을 잘했고, 상대방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태도가 있었다.
정우는 대화 중에 일부러 수진에게 말을 던졌다.
“지후 선배는 사람 참 좋아.
수진이랑 취향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수진은 정우를 힐끔 바라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후는 다정했고, 편안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정우는 유독 멀게 느껴졌다.
함께 있는 공간인데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한 느낌.
모임이 끝난 후, 수진은 정우에게 물었다.
“나… 왜 불렀어?
그냥 술자리였어?”
정우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길래.
네가 생각났어.”
순간, 수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날 소개해준 거야?”
“응. 너… 좋은 사람이랑 잘 지내면 좋겠어서.”
정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별 의미 없는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수진의 마음속엔 무언가 툭, 떨어져 내렸다.
그날 이후, 수진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정우는 나한테 마음이 없는 걸까?
나 혼자 정우를 좋아하고 있는건가?’
지후는 꾸준히 연락을 했고, 수진은 애매하게 받아주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정우보다 훨씬 다정했고,
무엇보다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수진은 자꾸 정우 쪽을 바라보게 됐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후의 말보다 정우의 표정이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정우는 점점 자신의 몸이 말처럼 따라주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계단을 오를 때도, 컵을 잡을 때도, 손에 힘이 빠졌다.
밤에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뻣뻣해졌고,
감정이 조금만 격해져도 숨이 가빠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수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알아채지 않길 바랐다.
자신이 점점 무너져가는 걸,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그래야 그녀가 떠날 수 있으니까.
그래야 그녀가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이었다.
며칠 뒤, 수진이 말했다.
“정우야, 나… 요즘 좀 이상해.
지후선배가 잘해줘도 자꾸 니가 생각나. 나 정말 이대로 지후선배랑 잘 지내도 돼?”
정우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너, 왜 자꾸 나한테 아무 말 안 해?
내가 다가가면, 넌 꼭 한 발 물러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돼?”
정우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다야.”
그 말은 담담했지만, 수진의 가슴에 깊게 박혔다.
그 말 뒤로, 침묵이 길었다.
수진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고, 정우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 시선을 피했다.
그날 밤, 수진은 혼자 걸었다.
정우와 어릴 적 자주 가던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 시절, 둘은 아무 말 없이 자주 걸었다.
그저 서로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기에.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는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이 가슴을 채웠다.
길거리 노점에서 붕어빵을 하나 샀다.
정우가 팥을 싫어하던 걸 문득 떠올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유는 없었다.
정우가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말없이, 조용히, 천천히.
사람이 멀어진다는 건 온도로 알 수 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순간, 관계는 끝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진은 그걸 처음 느꼈다.
정우의 손에서, 눈빛에서, 말투에서—
온도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사랑이 식는 게 아니라
사람이 멀어지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