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나는 왜 말하지 못했을까?

by seomar

진단서에 적힌 병명은 익숙한 단어였다.
"강직인간증후군(Stiff Person Syndrome)"
정우는 그 단어를 처음 보는 것처럼 오래 바라보다, 종이 한 귀퉁이를 천천히 구겨 넣었다.
서랍에 아무렇게나 넣고 덮었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엔, 그 단어가 새겨졌다.
지울 수 없는 문장처럼, 매일이 고통스러웠다.

아버지도 그랬다.
정우가 열 살 무렵, 갑작스럽게 휘청이던 아버지의 모습.
몸이 굳어져가고, 말이 느려지고, 표정이 점점 사라지던 그때.
어머니는 그걸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떠났다.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땐 몰랐으니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지만 지금은 안다.
같은 병, 같은 길.
이제는 자신이 그 길을 걷고 있다.

몸은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침이면 손끝이 저려왔고, 계단을 오를 땐 무릎이 자꾸 꺾였다.
가끔은 글씨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무거운 머리, 감겨오는 눈꺼풀, 식은땀.
그럴 때마다 정우는 옷깃을 세우고, 모자를 눌러 쓰고, 그저 평소처럼 행동했다.

수진 앞에서는 더욱.

하지만 점점 어렵게 느껴졌다.
예전엔 자연스러웠던 미소가, 이젠 연기처럼 느껴졌다.
대화 중에도 숨을 고르고, 손이 떨리지 않도록 의자 밑을 꼭 잡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을 속이며 살았다.


수진은 달랐다.
그녀는 점점 더 직감적으로 정우의 변화를 느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달라졌고, 어깨가 무거워졌고, 웃음이 줄어들었다.

“정우야.”

어느 날,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요즘 너, 무슨일 있어? 혹시 어디 아픈거야?”

정우는 짧게 웃었다.

“무슨 소리야. 나 멀쩡해.”

“거짓말하지 마.
너, 가끔 손 떨어.
걷다가 멈춰서고.
나, 다 보고 있어.”

정우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일이 좀 많아서.”

“또 그 말이야.
맨날 그런 식으로 넘기잖아.”

수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그냥 너무 오래 참아온 감정이 터져 나오는 목소리.

“왜, 나한텐 말 안 해?
예전엔… 아니,
우린 원래 다 말했잖아.
힘든 것도, 좋은 것도…”

정우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면, 네가 해줄 수 있는 건 있고?”

그 한마디에 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그녀는 손끝을 감쌌다.

그 순간, 둘 사이의 공기는 무거웠고,
침묵이 말보다 더 큰 의미를 품고 있었다.

**

며칠 뒤, 수진은 지후와의 저녁 약속을 가졌다.
조용한 레스토랑, 은은한 조명, 적당히 익숙해진 대화.
지후는 여전히 다정했고, 수진에게 꾸준히 진심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자꾸 핸드폰 화면을 훔쳐봤고,
머릿속엔 정우가 어떤 얼굴로 집에 있을지 떠올랐다.

지후가 말했다.

“수진 씨.
요즘… 정우랑도 계속 연락하지?”

“응. 뭐, 가끔.”

“정우… 많이 아파.”

그 한마디에 수진의 손이 멈췄다.

“뭐라고요…?”

“정우가 다니는 병원, 내가 아는 데야.
예전에 잠깐 같이 있던 교수님이 그 얘기하시더라구”

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후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말하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 나도 그냥 지켜봤는데,
솔직히, 그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

수진은 시선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정우가 정말로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수진은 정우의 반지하 집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리려다, 멈췄다.
창문 너머로 흐릿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자.
느릿하고, 휘청이는 움직임.
예전엔 그런 적 없었는데.

수진은 조용히 돌아섰다.
지금은 묻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았다.


정우는 그날 밤, 스케치북을 꺼냈다.
예전처럼 창문 앞에 앉아 무언가를 그렸다.
그림은 자꾸 번졌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림을 찢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손을 감싸며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이제… 더는 못 하겠네.”

그 말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미안함, 무력감,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말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


‘나는 왜, 말하지 못했을까. 내 곁에 있어달라는 건 내 욕심이겠지?’

그 말이 밤새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이제 둘 사이를 천천히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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