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목말

시제 : 말

by seomar
툰_01.png

가을 끝자락, 부모님이 살던 집을 정리하러 고향 정선으로 내려왔다. 우리 집은 시장 골목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나오는 오래된 연립주택이었다. 짐을 나르다 골목 끝 놀이터를 향해 발이 먼저 갔다. 녹슨 스프링 목마가 아직 있었다. 페인트는 벗겨져 말의 무늬를 알아보기 어려웠고, 한때 손이 닿지 않던 손잡이는 이제 앉아도 손끝에 닿았다. 지나가며 허벅지가 쇠에 스치자 차가운 기운이 “툭” 하고 붙었다. 오래된 비밀을 건드린 듯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아버지의 어깨였다. “목말 태워줄까?” 허리를 낮추던 사람. 나는 대충 신발을 벗어 젖히고 올라탔다. 아버지는 내 종아리를 두 손으로 받쳐 일어났고, 나는 그의 귀와 머리카락을 잡았다. 어깨 위에 서 보이는 세상은 먼저 안심이었다. 내 편이 바로 아래 있다는 안심. 그 다음에야 보였다. 골목의 은행잎이 샛노랗게 부서지는 것, 전봇대 스피커에서 라디오가 울리는 것. 그 높이에서 세상은 조금 더 넓고, 덜 무서웠다.

여름이면 늘 목이 말랐다. 오후의 먼지가 발목을 덮을 즈음, 아버지는 나를 태운 채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놀이터 가장자리 수돗가로 갔다. 낡은 수도꼭지를 틀면 처음엔 쇳내가 올라오고 곧 맑은 물줄기가 솟았다. 나는 어깨에서 내려와 목을 젖히고 입을 벌렸다. 물이 이마와 입술을 마구 때리면, 아버지는 웃으며 손바닥으로 내 턱을 받쳤다. “물 맛 괜찮지? 말도 물을 먹어야 달리지.” 그땐 농담인 줄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주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장날이면 시장 앞에 회전목마가 섰다. 낮인데도 불빛을 켜고, 둥근 음악이 흐르면 말들이 느리게 흔들렸다. 처음엔 보기만 해도 어지러워 못 타겠다고 버텼다. 아버지가 매표소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여기 보고 있을게.” 나는 말의 목을 껴안고 올라탔다. 세상이 타원형으로 흘러가도, 아버지의 손만은 한 자리에 머물렀다. 그 손을 보고 있으니 빙글거림이 금방 얌전해졌다.

눈이 허리까지 쌓이던 겨울밤도 있다. 아버지는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고 말했다. “왕자님, 말을 대령했습니다.” 나는 익숙하게 어깨 위로 기어올랐고, 아버지는 내 발목을 단단히 잡은 채 천천히 일어섰다. 가로등 불빛에 눈발이 우유처럼 흘렀다. 팔을 뻗어 눈송이를 잡아 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잡히지 않는 흰 점들이 자꾸 손바닥을 피했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걸었다.

툰_02.png

세월이 지나면서 놀이터의 모래는 다져졌고, 동네 어른들의 평상 자리도 사라졌다. 아버지는 작은 습관들을 하나씩 놓았다. 마지막으로 내 자리를 허리로 내주던 날, 아버지는 말했다. “이제 네 어깨가 더 넓다.” 웃음 끝이 바람에 닿아 금세 사라졌다. 그 말은 칭찬이라기보다 작은 ‘위임장’ 같았다. 그때는 잘 못 읽었다.

오늘, 나는 그 ‘위임장’을 늦게야 읽었다. 스프링 목마에 조심스레 앉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삐걱.” 오래된 철이 소리를 냈다. 예전 같은 튕김은 없고, 내 몸무게만 또렷했다. 그때 옆에서 작은 손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빠, 내 차례.” 아들이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 목마의 등을 한 번 쓸어 주었다. 무거운 몸이 비켜나자 스프링이 “퉁” 하고 제자리로 올라왔다. 아이는 손잡이를 꼭 붙들고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금방 속도가 붙었다. 혹시 몰라 뒤에서 한 손을 등 뒤에 대고 걸음을 맞췄다. 아이의 웃음이 공기를 흔들었다. 그 웃음을 따라 몸을 움직이고 있으니 내 어깨가 먼저 지쳤다.

우리는 수돗가로 갔다. 수도꼭지를 틀자 찬 물이 맑게 솟았다. 아이가 먼저 한 모금 마시고, 나는 잔을 바꿔 입술을 대었다. 쇳맛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고, 속으로 또렷하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괜찮아요. 아직은 잘 달리고 있어요.”

골목을 돌아 집으로 오는데, 저녁빛이 길어졌다. 내 그림자가 아이의 그림자 옆에서 나란히 늘었다가 포개졌다가 다시 갈라졌다.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 두 그림자가 천천히 앞으로 달렸다.


금요일 연재
이전 05화돌담 우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