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 : 동심
학교 뒤편 느티나무 그늘 아래 돌담을 돌아 내려가면 손바닥만 한 구멍이 있다. 세림이는 그걸 ‘우체국’이라 불렀다. 종이쪽지, 깃털, 녹은 사탕 껍질 같은 보물들이 들어 있었고, 그것들을 꺼내는 일은 매일 아침의 중요한 의식이었다.
하교길이면 세림이가 먼저 도착해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쪽지를 꺼내 펼치면 윤호가 도착했고, 둘은 그것 중 하나를 골라 놀이를 정했다. 규칙 같은 건 없었지만, 둘만의 신호였다.
어느 날, 구멍 깊은 곳에서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힌 쪽지를 발견했다. ‘빨리 와라.’ 크레파스로 그린 종이배 그림 옆엔 빨간 깃발이 흔들렸다. 세림이는 윤호를 향해 손을 뻗었고, 둘은 수로 옆으로 달려갔다.
윤호는 우유곽으로 배를 만들고 세림이는 공책 뒷장으로 종이배를 접었다. “이긴 사람이 간식 먹기!” 두 배는 물 위로 미끄러졌다. 하늘이 잿빛으로 변하고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비는 아프지 않았고, 경주는 계속됐다. 배가 풀포기에 걸려 뒤집히자 둘은 눈이 마주쳤고, 깔깔 웃음이 터졌다.
다음 날, 세림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서야 윤호는 듣게 되었다. “이사 갔대… 다리 공사 시작해야 해서.” 윤호는 우체국으로 달려갔고, 구멍 속에서 종이쪽지들이 흘러나왔다. 숫자가 적힌 쪽지들, 1번부터 30번까지. 그는 첫 번째 쪽지를 펼쳤다. ‘비 오면 웃어. 우체국이 바빠져.’
그날 이후, 윤호는 매일 우체국에 들렀다. ‘3, 내일은 네가 나 없는 줄 몰랐으면 좋겠어.’
‘7, 송사리 많이 잡아.’
‘12, 엄마가 고무줄 새로 사 주셨어.’
‘20, 진짜로 내가 웃는지 돌담이 알까?’
쪽지 하나하나에 세림이의 말투, 표정, 마음이 담겨 있었다.
세 번째 주가 되던 날, 윤호는 인부들 눈을 피해 돌담 옆에 앉았다. 공책에서 가장 두껍고 튼튼한 장을 뜯어 종이배를 접고, ‘도착지: 무지개 근처’라고 썼다. 천천히 떠내려가는 배 위로, 바람에 울리는 풍경 소리가 들렸다. ‘짠.’ 마치 세림이가 대답하는 듯했다.
비 오는 날, 윤호는 ‘25’를 펼쳤다.
‘네가 배를 띄울 것 같아서, 나도 오늘 웃을 거야. 비가 안 와도. 우체국은 맑은 날에도 바빠.’
윤호는 억지로라도 웃었다.
“김치.”
그리고 첫 번째 쪽지를 떠올렸다. ‘비 오면 웃어.’
한 달째 되는 날, 마지막 쪽지만이 남아 있었다.
‘30, 너의 배가 무지개 근처에 도착하면 나도 같은 하늘 아래 있을 거야. 우체국은 돌담에만 있지 않대. 하늘에도, 물에도, 네 웃음에도 있대.’
윤호는 그 쪽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돌담에 기대 섰다. 바람이 스치고, 풍경이 또 울렸다.
‘짠.’
“얼마나 멀리서 보낸 거야. 편지가 아직도 안 오네.”
윤호는 중얼거리며, 오지 않을 집배원을 기다렸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 봄이 왔다. 세림이 없는 계절은 천천히 흘렀다. 여름이 오기 전, 윤호는 논 끝에 앉아 풀잎을 입술 사이에 끼웠다.
“삐—삐.”
아직 온전한 노래는 아니었지만, 풍경이 대답했다.
‘짠.’
윤호는 웃었다.
그 소리는, 세림이의 웃음과 많이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