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 바람
바람은 늘 같은 방향에서 오지 않았다.
골목 끝, 오래된 문방구의 유리문에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었다. 누가 들어올 때마다 “딸랑” 하고 울리던 그 종은, 어느새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소리를 냈다. 소리가 너무 자주 울려서인지 주인은 종을 떼어낼까 하다가도, 떼어내면 더 조용해질까 봐 그냥 두었다.
문방구 주인 윤서는 바람이 많은 날이면 괜히 손이 분주해졌다. 연필을 가지런히 맞추고, 공책 모서리를 매만지고, 지우개를 닦아 윤을 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바람이 들락날락하는 가게는 늘 어딘가 비어 보였다. 물건은 가득한데도.
윤서가 이 문방구를 물려받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카운터 뒤 벽에 붙은 누런 종이였다. ‘바람 접는 법’. 손글씨였다. 글씨는 단정했지만, 끝이 살짝 흔들렸다.
— 바람은 보이지 않으니, 보이는 것에 얹어 접는다.
— 바람이 지나간 자리의 냄새를 기억한다.
— 바램은 너무 꽉 접지 말 것. 펴지지 않는다.
윤서는 그 글을 농담처럼 여겼다. 바람을 접는다니, 바람을 어떻게 접나. 하지만 문방구에는 ‘바람 종이’라는 게 있었다. 얇고, 반투명하고, 조금만 힘을 줘도 찢어질 것 같은 종이. 포장지처럼 보이지만 손끝에 닿는 느낌이 묘하게 차가웠다.
윤서는 바람 종이를 손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특별한 물건은 아니었다. 다만, 그 종이를 만지면 어떤 날은 손끝이 간질거렸고, 어떤 날은 갑자기 어깨가 가벼워졌다. 그럴 때면 윤서는 카운터 아래에 숨겨 둔 바람 종이를 꺼내 조심히 펼쳤다. 종이에서 아주 희미하게, 마치 밖에서 불어온 것처럼 공기의 결이 느껴졌다.
어느 날은, 바람 종이를 펼치자 비누방울 같은 소리가 났다. “툭.”
그 소리와 함께 아주 작은 바람이 가게 안을 한 바퀴 돌고는 사라졌다. 연필 끝이 살짝 떨리고, 매달린 종이 딸랑거렸다. 윤서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은 그냥 종이가 아니구나.
그날 이후 윤서는 누런 종이에 적힌 ‘바람 접는 법’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바람을 접는 건, 바람을 잡는 일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것을 잠시 머무르게 하는 일이었다. 윤서는 바람이 센 날이면 가게 문을 일부러 아주 조금 열어두었다.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공책 더미 사이를 지나가고, 스티커 진열대를 흔들고, 형광펜을 굴렸다. 그럴 때 윤서는 바람 종이를 펼쳐 바람의 방향을 따라 살짝 기울였다. 그러면 종이가 바람을 받아, 마치 물을 뜨듯 바람을 ‘얹었다’.
그리고 접었다.
반듯하게 접어야 한다고 누런 종이는 말하지 않았다. 바람은 반듯하지 않으니까. 윤서는 그때그때 손이 가는 대로 접었다. 어떤 바람은 길쭉하게, 어떤 바람은 네모나게, 어떤 바람은 접고 또 접어 아주 작은 삼각형이 되었다. 접힌 바람 종이는 가벼웠지만, 손에 쥐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공기만이 아니라, 바람이 데려온 것들의 무게였다.
그러나 윤서가 바람을 접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람과 바램이 발음만 닮았다고, 사람들이 가볍게 말할 때가 있다.
하지만 윤서는 알고 있었다. 바람이 없으면 바램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바램은 마음속에만 있으면 한 곳에 웅크려 있다. 바람이 와야, 그것이 흔들리고, 방향을 찾고,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긴다.
윤서에게도 바램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바램.
윤서가 열여덟이던 해, 집은 갑자기 비어 버렸다. 사람은 떠나고, 남은 건 먼지와 소음뿐이었다. 윤서는 그때부터 문방구를 지켰다. 누구도 지키라고 한 적 없었지만, 윤서는 지키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가게를 지키는 동안, 윤서의 바램은 천천히 접혔다. 너무 꽉. 펼치기 어려울 정도로.
그 바램은 한 문장이었다.
“한 번만, 바깥으로 나가 보고 싶다.”
바깥. 윤서는 그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어딘가 쓴맛이 났다. 가게 밖은 넓었고, 넓은 곳은 늘 두려웠다. 윤서는 좁은 곳에 익숙해졌다. 좁은 곳에는 바람이 덜 들어오고, 덜 흔들리고, 덜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런 윤서 앞에, 봄바람처럼 가벼운 손님이 나타난 것은 3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손님은 중학생쯤 되어 보였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머리칼은 바람에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자 종이 “딸랑” 하고 울렸고, 그 아이는 고개를 들며 웃었다.
“여기… 바람이 많이 드네요.”
윤서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는 연습장과 검은 펜을 고르고, 스티커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카운터 앞에 서서 계산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이는 돈을 꺼내기 전에, 카운터 옆에 붙은 누런 종이를 바라보았다.
“바람 접는 법… 진짜로 있어요?”
윤서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걸 왜 알아?”
“그냥… 궁금해서요.” 아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바람이 오면 꼭 뭔가 하고 싶거든요. 바람이 오면, 마음도 같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서.”
윤서는 그 말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아,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는 이어 말했다.
“사실 저… 소원 같은 게 있어요. 근데 엄마한테 말하면 안 된대요. 말하면 도망간대요, 소원이.”
윤서는 웃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대신 물었다.
“소원은 도망가기도 해.”
“그렇죠?”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접어 두면 안 도망가나요?”
윤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카운터 아래에서 바람 종이를 꺼냈다. 아이의 눈이 더 커졌다.
“이게… 뭐예요?”
“바람 종이.”
“진짜로 바람을 접을 수 있어요?”
윤서는 대답 대신, 가게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마침 밖에서 바람이 들어와 아이의 머리칼을 스쳤다. 스티커 몇 장이 살짝 들썩이고, 문 종이 딸랑 울렸다.
윤서는 바람 종이를 펼쳤다. 종이를 바람의 결에 맞춰 살짝 기울이자, 종이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윤서는 종이를 ‘얹듯이’ 바람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접었다. 한 번. 또 한 번. 종이의 끝이 가늘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윤서는 아이에게 말했다.
“바램은 너무 꽉 접지 마.”
아이의 표정이 잠깐 굳더니, 금세 웃었다.
“저, 제가 접어도 돼요?”
윤서는 바람 종이 한 장을 더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종이를 소중한 편지처럼 받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연습장과 펜을 꺼내, 작은 글씨로 뭔가를 적었다. 윤서는 그 글을 읽지 않았다. 읽으면 바램이 남의 것이 되어 버릴까 봐.
아이의 손이 종이를 접는 동안, 가게 안의 바람이 조용히 모였다. 바람은 아이의 손끝을 따라 조금씩 모양을 바꾸는 듯했다. 접히고, 접히고, 다시 접히면서, 바람은 작은 봉투처럼 변했다. 아이는 마지막에 종이 끝을 살짝 펴서, 숨구멍 같은 작은 틈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숨 쉴 수 있죠?”
윤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계산을 마치고 나가려다가, 문 앞에서 돌아섰다.
“아저씨.”
“아저씨 아니야.”
“그럼… 사장님.” 아이는 웃었다. “사장님 바램도 접어 놓으셨어요?”
윤서는 말문이 막혔다. 바람 종이를 접는 건 익숙했지만, 자신의 바램을 말로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아이는 기다리지 않았다. 다만 말해 주었다.
“접어도 되고, 펴도 돼요. 바람은 계속 오니까.”
그리고 아이는 문을 열고 나갔다. 종이 딸랑 울리고, 바람이 또 한 번 가게를 훑었다. 아이가 나간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따뜻한 공기만 남았다.
그날 밤, 윤서는 가게 문을 닫고 혼자 카운터 앞에 앉았다. 불을 끄지 못했다. 가게 안이 너무 조용하면, 마음속의 바램이 더 크게 들릴까 봐.
윤서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래전에 접어 둔 바람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윤서가 처음으로 접었던 바람이었다. 너무 꽉 접어, 모서리가 딱딱해진 종이. 손에 쥐면 바람이 아니라 돌처럼 느껴졌다.
윤서는 누런 종이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 바램은 너무 꽉 접지 말 것. 펴지지 않는다.
윤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종이를 펴기 시작했다. 종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래 접힌 마음이 펴질 때 나는 소리 같았다. 한 겹을 펴자 차가운 바람이 “후” 하고 새어 나왔다. 두 겹을 펴자, 먼지 냄새와 함께 어떤 기억이 스쳤다. 세 겹을 펴자,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윤서는 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 다시 폈다.
마지막 겹을 펼치자, 바람은 갑자기 살아났다. 가게 안을 크게 한 바퀴 돌며 연필통을 흔들고, 달력을 넘기고, 유리문 종을 크게 울렸다. “딸랑—!”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윤서는 그 바람 한가운데서, 자신이 적어 둔 작은 글씨를 보았다.
바람 종이 위에, 희미한 잉크로 한 문장이 있었다.
“한 번만, 바깥으로 나가 보고 싶다.”
윤서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웃을 뻔했다. 웃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바람은 윤서의 볼을 스쳤다. 차갑지 않았다. 누군가 손바닥으로 어깨를 밀어 주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힘이 있었다.
윤서는 바람 종이를 다시 접지 않았다. 대신 종이를 유리문에 붙였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이 종이를 통과해, 글씨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유리문 한가운데에 조용히 떠 있는 바램.
다음 날, 바람이 또 불었다. 유리문이 살짝 떨리고, 종이 딸랑 울렸다. 손님이 하나둘 들어왔다. 윤서는 평소처럼 계산을 하고, 공책을 정리하고, 연필을 맞췄다. 그런데 어느 순간, 윤서는 자신이 자꾸 문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오 무렵, 어제의 아이가 다시 왔다. 아이는 가게 문을 열자마자 윤서가 붙여 놓은 종이를 보고 멈춰 섰다.
“사장님, 펴셨네요.”
윤서는 “그래”라고 대답하려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는 주머니에서 어제 접어 둔 바람 종이를 꺼냈다. 종이는 아직도 접힌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표면이 살짝 부풀어 있었다. 숨을 쉬는 것처럼.
“저도요.” 아이가 말했다. “어제 집에 가는 길에, 바람이 계속 불어서… 왠지 이걸 안고 있으면 무섭지 않더라고요.”
윤서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알았다. 바람을 접는 건 바람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두려움을 잠시 가볍게 만드는 일이었다. 바람은 늘 떠나지만, 떠나기 전에 우리 안의 무거운 것을 한 번 들어 올려 준다. 그 틈에 바램이 숨을 쉴 수 있다.
아이의 시선이 윤서의 얼굴로 올라왔다.
“사장님, 오늘은 바깥으로 나가요?”
윤서는 잠깐 망설였다. 바깥은 여전히 넓었고, 넓은 곳은 여전히 두려웠다. 하지만 유리문에 붙은 바램이, 바람이 불 때마다 살짝 흔들렸다. 마치 ‘나도 움직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윤서는 앞치마를 벗어 걸었다. 카운터 위에 ‘잠시 외출’이라고 적힌 종이를 올려두었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었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은 살아 있다는 감각처럼 선명했다. 윤서는 문밖에 한 발을 내딛었다. 바람이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머리칼을 흔들었다. 바람은 앞으로 가자고 말하는 듯했다.
윤서는 뒤돌아 가게 안을 한 번 바라봤다. 문방구는 그대로였다. 좁고, 익숙하고, 안전한 곳. 하지만 이제는 그 안에 바램이 붙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면서도 찢어지지 않는 바램.
윤서는 고개를 돌려 길을 보았다. 길 끝에는 나무들이 흔들리고 있었고, 하늘은 생각보다 높았다. 바람은 윤서의 등 뒤를 살짝 밀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것처럼.
윤서는 조용히 말했다.
“바람이 오면, 바램도 같이 움직이는 거였구나.”
그리고 그날, 윤서는 바람을 더는 접지 않았다.
대신 바람을 타고, 바램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