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자의 하루

시제 : 여행

by seo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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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 도현은 눈을 뜬다.


자명종이 울리기 전이다. 이런 순간이 좋다고 그는 생각한다. 소리에 끌려 일어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는 느낌이니까. 그는 창틀에 손바닥을 얹는다. 금속의 차가움이 피부로 번지고, 차가움이 생각을 또렷하게 만든다. 아직 도시는 숨이 얕다. 바람도, 소리도, 불빛도 한 박자 늦게 움직인다.

도현에게 ‘오늘’은 남들과 같은 단어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오늘이 출근과 회의와 약속의 묶음이라면, 도현에게 오늘은 설명할 수 없는 업무일이다. 그는 그걸 알고 있다. 입을 열면 끝장이라는 것도. 그래서 ‘오늘’은 마음속에서만 정의된다. 일정표에 적히지 않고, 누구에게도 공유되지 않고, 보고서에도 남지 않는 하루. 그래도 매일 시작된다. 시작되는 순간이 가장 이상하다. 아무도 모르는 하루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는 씻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선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건조하다. 아스팔트는 밤의 온도를 붙잡고 있고, 작은 소리도 멀리 간다. 차에 시동을 걸면 계기판 불빛이 얼굴을 희미하게 비춘다. 도현은 핸들을 잡는다. 이 동작은 일상적이어야 하는데, 매번 출발선 같다.


집에서 그곳까지는 보통 서른여덟 분.
정확한 숫자다. 그는 그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명확해서 오히려 비밀이 된다. 신호에 걸리면 마흔 분을 넘기고, 길이 비면 숫자는 정확히 그쯤에서 멈춘다. 지도는 모호해도, 시간은 거짓말을 덜 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여기가 내 직장이라는 건, 이 숫자가 증명한다.

공단 끝자락, 창고들이 비슷한 모양으로 늘어선 길.

그는 그중 하나 앞에 차를 세운다. 겉보기엔 평범하다. 낡은 철문, 바랜 표지, 아무 의미 없는 번호. 지나가는 사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멈춰야 하는 사람만 멈춘다. 도현은 그 사실이 싫다. 선택지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문 앞에 서면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진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감각이 먼저 알아챈다. 도현은 숨을 고르고 손목을 들어 올린다. 습관처럼, 그러나 매번 새로 배우는 사람처럼. 그는 알고 있다. 이곳에서는 ‘익숙함’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홍채. 지문. 안면.
세 겹의 인증이 끝나는 순간, 안쪽에서 낮은 진동이 울린다. 은빛 링이 천천히 회전한다. 기계는 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대신 진동으로 존재감을 밀어 넣는다. 도현은 발끝에서부터 몸이 정렬되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세계가 그를 ‘정상 위치’로 맞추는 것처럼.


“김 박사.”

책임자인 장 대위의 목소리가 들린다. 단정하고, 낮고, 빈틈이 없다. 도현은 그 목소리를 싫어한다. 싫어하는 이유를 안다. 저 목소리는 언제나 규칙을 먼저 꺼내기 때문이다.


“오늘은 규칙 꼭 지켜주세요. 역사 개입, 절대 금지.”

도현은 짧게 대답한다.
“알고 있습니다.”

짧은 대답.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더 긴 문장이 울린다.
알고 있다. 알고 있고, 그래서 더 불안하다. 규칙을 아는 건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규칙이 ‘어길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매번 상기시킨다.

링이 속도를 올린다.

시야가 접히듯 말렸다가, 펼쳐진다. 몸이 아니라 세계가 접히는 느낌이다. 도현은 이 감각을 여러 번 겪었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익숙해지면 더 무섭다. 자신이 ‘낯설어해야 할 것’을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이 망가진다고 그는 생각한다.


가장 먼저 냄새가 온다.
그을음, 수액, 젖은 흙.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과거가 폐 속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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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기원전 1200년.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
며칠 뒤면 불 속에서 지워질 도시. 지도에서 사라질 자리. 하지만 지금은 살아 있다. 연기 기둥이 솟고, 멀리서 쇳소리가 부딪힌다. 비명은 벽을 타고 돌아온다. 도현은 몸을 낮추고 벽을 따라 이동한다. 규칙은 단순하다. 보되, 만지지 않는다. 듣되, 바꾸지 않는다.


그때 작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붙든다.

“도와주세요.”

여덟 살 남짓의 소녀다. 눈동자가 크고, 두려움이 그 안에서 흔들린다.
뒤쪽에서 군화 소리가 가까워진다. 돌을 찍는 금속 소리, 숨이 목에 걸리는 소리. 도현은 규칙을 떠올린다. 동시에 소녀의 눈을 본다. 그는 자기 안에서 두 문장이 충돌하는 걸 느낀다. 개입 금지와 놓고 갈 수 없음.

망설임은 길지 않다. 그는 소녀를 품에 안아 그늘진 통로로 들어간다. 숨을 죽인다. 병사들이 코앞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소녀의 손이 그의 옷을 놓지 않는다. 도현은 그 손의 힘을 느끼며 생각한다. 이건 규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병사들이 멀어진 뒤에야 그는 소녀를 내려놓는다.
그 순간, 소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눈에 들어온다. 닳은 뼈조각. 오래된 매듭. 부서질 듯 가볍지만 이상하게 선명하다. 도현은 그 형태를 마음에 새긴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허용된 개입은 기억뿐이다. 그러면서도 안다. 이미 무언가를 바꿨다. ‘기억만’이 아니라 ‘숨’이 추가됐다는 걸.


귀환 후, 샤워기 물 냄새가 낯설다.
현대의 비누 향이 이질적이다. 도현은 물줄기 아래서 중얼거린다.

“나는 목격자다. 증인일 뿐.”

문장을 반복하면 마음이 정리되는 척한다.
하지만 반복할수록 문장 끝이 헐거워진다. 틈이 생기고, 틈으로 장면들이 들어온다. 조선의 해안, 성벽 위에서 활시위를 잡고 손이 떨리는 사람들. 1920년대 경성, 뒷골목에서 청년이 문서를 숨기다 붙잡히는 순간. 서로 다른 시대인데, 겹쳐진다. 한 사람이 여러 번 같은 꿈을 꾸는 것처럼.


그때마다 손목시계가 반 박자 느리게 뛴다.
도현은 초침을 보고도 믿지 못한다. 시간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흔들리는 건 아닐까. 그는 그런 생각을 지우려 한다. 생각은 위험하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개입이 된다.

며칠 뒤, 도현은 기원전 3000년 스페인 북부의 석회암 동굴에 내려선다.
바닥에는 웅크린 소녀의 인골이 있고, 그 옆에 작은 목걸이가 놓여 있다. 하투사에서 본 것과 닮아 있다. 닮았다는 사실이 먼저 심장을 친다. 도현은 ‘연결’을 느낀다. 연결은 금지된 단어다. 연결은 개입의 시작이다.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어깨가 꺾인 사내가 들어와 시신 앞에서 울음을 삼킨다. 도현은 본능처럼 손을 내민다. 그리고 멈춘다. 멈추는 게 규칙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그는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목걸이를 잠깐 들어 올려 매듭을 살핀다. 두 번 꼬고 끝을 안으로 숨기는 방식.
그는 물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한다. 방법만 기억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기억만 가져가면 규칙을 지킨 거라고.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이미 안다. ‘방법’도 흔적이다. 사람은 방법을 쓰고,

방법은 세상을 바꾼다.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내의 미소, 아들의 장난기. 평범한 행복이라서 더 눈부시다. 그런데 이상하다. 서로 다른 날 찍힌 사진들인데도 아들의 눈동자 반사광이 늘 같은 각도와 크기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정확하다. 도현은 액자를 내려놓고 숨만 고른다. 현실이 아주 조금씩 복제되는 느낌. 맞춰져야 할 자리에 억지로 끼워 넣은 느낌.


다음 임무는 서기 79년 폼페이.
시장 한복판에서 아이를 안은 여인이 길을 묻는다. 도현은 규칙을 되뇐다. 개입 금지. 입술이 그 말을 따라가기도 전에, 그는 이미 말해버린다.

“성문 밖으로 가세요. 오늘은… 그쪽이 안전해요.”

여인은 놀라 그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입가에 작은 안도가 번진다. 도현은 그 안도를 본다. 그리고 안다. 그 안도가 자신을 무너뜨린다는 걸. 그는 확인할 수 없다.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러나 ‘말해버린 자신’은 되돌릴 수 없다.


연구소로 돌아오자 경고가 뜬다. ‘미세 개입.’
장 대위의 목소리가 더 차갑다.

“다음엔 퇴출입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자란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면 사람은 두 번 사라진다. 한 번은 죽음으로, 한 번은 망각으로. 그는 자신이 지금 그 망각을 막고 있다고 믿고 싶다. 믿고 싶다는 건, 이미 흔들렸다는 뜻이다.


다음 새벽, 연구소 복도에서 형광등이 미세하게 떤다.
익숙한 얼굴들이 물결처럼 흔들려 보인다. 도현은 눈을 깜박여도 흔들림이 사라지지 않는 걸 느낀다. 자신이 흔들리는지, 세상이 흔들리는지 모른다.

“준비되셨습니까?” 장 대위가 묻는다.

도현은 링 앞에서 멈춘다.
“잠깐만요. 지금… 몇 년도죠?”

짧은 웃음이 돌아온다. 답은 없다.

유리벽 너머 모니터가 켜진다.


그의 집 거실이 보인다. 아내와 아들이 있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도현과 닮은 남자가 앉아 있다. 너무 닮아서 낯설다. 낯설어서 확신이 생긴다. 저건 ‘나’가 아니다. 그런데도 ‘나’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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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 장 대위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이제 아셔야 합니다. 당신은 ‘기록자’입니다. 원래의 김도현 박사는 5년 전 첫 임무에서 사망했고, 우리는 그의 기억을 스캔해 당신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장치의 일부죠.”

도현은 한동안 말을 잃는다.


그리고 겨우 말한다. “나는…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신이 본 과거는 모두 실제입니다. 다만 당신의 존재는 기록을 위한 매개일 뿐.”

말이 공기 속으로 떨어진다. 잿빛처럼 가라앉는다.


도현은 제어 패널 앞으로 걸어간다. 손이 떨리지 않는다. 너무 차분해서 무섭다. 도구라면, 누구의 이야기로 남을 것인가. 기록이라면, 무엇을 살려두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

그는 긴급 정지를 누른다.

은빛 링이 울부짖고, 공기가 뒤집히며 불꽃이 튄다.


“멈춰요!” 누군가 소리친다. 도현은 눈을 감는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하투사의 골목, 뼈조각 목걸이, 성문 밖으로 이어지는 밝은 흙먼지. 그리고 누군가의 숨.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아 있으려는 숨.

그날 이후, 연구소에서 도현의 모습은 사라진다.

대신 보고서들에 미묘한 변화가 잇달아 기록된다.


하투사 성문 근처 층위에서 발견된 어린이 목걸이 매듭법이 지역 전례와 다르고, 폼페이 북문 길 위 응고된 재 더미에는 성인과 아이의 발자국이 성문 밖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스페인의 동굴 벽에는 손무늬가 한 겹 더 겹쳐 있는데, 그 크기가 어른과 아이의 중간쯤이다.

어떤 학자는 그 차이를 “기억의 편차”라고 부른다.
어느 보고서에도 김도현이라는 이름은 남지 않는다. 그러나 몇몇 눈동자는 여전히 낯선 각도의 빛을 반사한다. 누가 지나간 자리처럼, 이야기의 온도가 아주 조금 달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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