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 : 용기
골목 끝에 작은 꽃집이 있다. 간판엔 ‘봄의 조각’이라는 이름이 비뚤게 매달려 있다. 문을 열면 살짝 서늘한 공기와 젖은 흙 냄새가 먼저 다가온다.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들이 화분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른다.
이 가게의 주인 도윤은 예전엔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색만 바라보며 살던 화가. 그러나 한 번의 불길이 작업실과 그림, 손끝의 감각까지 모두 데려가 버렸다. 그날 이후, 그림을 그리던 도윤은 붓 대신 삽을 들었다.
꽃집 한가운데 서서 그는 가끔 생각한다. 다양한 꽃을 보면서 이제는 표현하지 못한 다양한 색이 떠오른다고. 그러나 손등까지 내려온 소매 끝으로 보이는 화상 자국을 보는 순간 그날처럼 아팠다. 그래서 그는 꽃에 물을 주고 꽃에 다듬고 흙을 다독였다.
어느 겨울 끝자락, 단골 할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코트 어깨에 흰 눈이 몇 알 매달려 있었다.
“오늘은 꽃보다… 조금 더 따뜻한 게 필요해서 왔어요. 손녀가 내일 큰 수술을 받거든요. 잘 될 거라 믿으면서도, 마음이 자꾸 흔들려요.”
도윤은 말없이 진열대 아래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아직 단단히 감긴 봉오리를 달고 있는 히아신스 한 송이를 골라 화병에 담았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곧 향기를 피울 거예요. 할머니 마음이 버티는 동안, 이 아이도 천천히 피어날 거예요.”
할머니는 오래도록 꽃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유리병을 꼭 끌어안고 돌아갔다. 문이 닫히자 다시 서늘한 공기가 가게 안에 번졌다. 도윤은 혼자 남은 히아신스 자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꽃은 서두른다고 빨리 피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시간만이 봉오리를 연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며칠 뒤 가게 문을 닫으려던 늦은 저녁, 휴대전화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손녀가 잘 회복하고 있어요. 수술 당일, 히아신스가 딱 한 송이 피었답니다. 향기가 퍼질 때 병실 공기가 조금 따뜻해졌어요. 당신이 건넨 온기, 잊지 않을게요.”
문자를 다 읽고 나서도 도윤은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가게 안을 둘러보니 아직 봉오리인 꽃과 막 피기 시작한 꽃들이 뒤섞여 있었다. 다 피지 않아도 괜찮아 보였다.
그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오래 닫아 두었던 상자를 열었다. 낡은 화구와 굳은 물감, 아직 쓸 수 있는 몇 개의 붓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쥔 붓은 여전히 조금 떨렸지만, 이번엔 그대로 두었다.
그날 밤, ‘봄의 조각’ 간판 아래 작은 이젤이 하나 놓였다. 꽃 한 송이를 그린 첫 스케치가 밤 공기 속에서 살짝 흔들렸다. 완벽하진 않으나 누군가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덜 춥게 만들어 줄 만큼의 온도였다.
오늘의 봄은 그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