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 : 핑크
햇살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었다. 은경은 이삿짐 박스 위에 놓인 작은 핑크색 머그컵을 들여다보았다. 손잡이에는 머리카락 같은 금이 가 있었다. 컵을 쥐자 손끝에 잔흠집이 닿았다. 오래 서랍 밑에 가라앉아 있던 시간도 함께 만져지는 듯했다. 십 년 전, 마지막으로 이 컵에 커피를 따르던 아침이 묵은 향처럼 되살아났다.
대학 신입생 때의 봄이었다. 축제 첫날 운동장에는 천막들이 들꽃처럼 흩어져 있었다. 친구들과 돌아다니다 수공예 공방 부스 앞에서 은경은 걸음을 멈췄다. 진열대 위에 핑크색과 하늘색 머그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커플이 사면 딱이겠다.”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은경은 웃음 뒤에서 심장이 한 번 더 뛰는 걸 느꼈다.
“우리도 맞춰서 살까?”
그가 장난처럼 물었고, 은경은 모른 척 받아쳤다.
“커플 아니어도 같이 쓸 수는 있지.”
그날 둘은 각자의 색을 골랐다. 지훈은 하늘색을, 은경은 핑크색을 집었다. 비닐봉지 안에서 컵 두 개가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어쩐지 오래 남을 약속처럼 들렸다.
그 뒤로 둘은 자주 함께 있었다. 도서관에서는 늘 비슷한 자리에 앉았고, 새벽이면 배달 라면을 나눠 먹었고, 시험이 끝나면 버스정류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어느 날 기숙사 방에 놀러 온 지훈이 책상 위의 컵을 보고 말했다.
“우리 컵, 아직 있네?”
“너는?”
“매일 아침 그걸로 커피 마셔.”
조금 들뜬 얼굴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벚꽃이 만개한 날, 지훈은 길가에 떨어진 꽃잎 하나를 주워 그녀의 머리 위에 얹어주었다.
“핑크가 너랑 잘 어울린다. 컵도, 꽃도.”
그 순간 은경은 알았다. 장난처럼 흘려보내던 말들이 어느새 한쪽 방향으로 모이고 있다는 것을. 지훈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봄은 때때로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몰아간다.
하지만 여름이 지나고 졸업이 가까워지자 둘은 서로보다 각자의 앞날을 먼저 감당해야 했다. 은경은 해외 연수를 준비했고, 지훈은 밤늦게까지 자기소개서를 붙들었다. 답장은 늦어졌고, 약속은 미뤄졌다. 함께 있어도 예전처럼 오래 웃지 못했다.
“우리, 좀 서로에게 소원한거 같아.”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이 변명인지 고백인지 모호해서 둘 다 오래 침묵했다는 것만은 선명했다.
결국 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색 컵은 지훈의 가방으로 들어갔고, 핑크색 컵은 은경의 서랍 깊숙이 밀려났다. 그 뒤로 컵을 본다는 건 오래도록 스스로를 벌주는 일과 비슷했다.
오늘, 이삿짐을 정리하던 은경은 오래 미뤄둔 마음을 꺼내듯 컵을 씻었다. 금은 조금 더 넓어져 있었지만 물은 새지 않았다. 드립 포트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떨어지고, 커피 향이 부엌에 번지기 시작할 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순간, 세월이 한 발 물러서는 듯했다. 지훈은 흰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은경이… 맞지?”
그가 조심스럽게 웃었다.
“내 우편함에 네 이름으로 된 우편물이 잘못 들어왔어. 이름 보고도 한참 망설였어. 같은 이름일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
은경은 그의 손에 들린 봉투를 잠시 바라보았다. 적힌 이름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낯익은 얼굴과 어색한 웃음이 한순간에 오래전 봄을 끌어왔다.
“나도 이 건물에 살고 있어. 아래층.”
그는 머쓱하게 덧붙였다.
“우편함에 그냥 넣어둘 수도 있었는데… 반가워서. 혹시나 하고 올라와 봤어.”
말끝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은경은 한 박자 늦게 문을 더 열었다.
“들어와.”
식탁 위에는 막 내린 커피와 핑크색 컵이 놓여 있었다. 지훈은 컵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아직 가지고 있었네.”
“버리기가 쉽지 않더라.”
은경이 웃으며 되물었다.
“너는?”
“나도 아직 써. 새로 산 컵도 많은데, 아침엔 늘 그걸 찾게 돼.”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이상하지? 조금.”
은경이 장난처럼 말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해돼.”
한동안 둘은 식어가는 커피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은 향이 한 번 가라앉고 나서야 꺼낼 수 있다.
“그땐 많이 바빴지.”
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바빴던 것도 맞고… 서툴렀던 거겠지.”
은경은 컵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며 말했다.
“그때의 우린 사랑보다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어. 그러다 사랑을 놓쳤고.”
둘은 거의 동시에 웃었다. 지나간 것을 인정하는 웃음은 이상하게 다정했다.
창밖으로 벚나무 가지가 보였다. 올해는 개화가 늦어 꽃망울이 아직 단단했다. 지훈이 낮게 물었다.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고 하면 너무 쉬운 말 같을까.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고… 천천히. 커피처럼.”
은경은 손잡이에 번진 금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그것은 깨진 흔적이라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새겨놓은 가느다란 지도 같았다.
“천천히라면.”
그녀가 말했다.
“하루에 한 모금씩은 괜찮아.”
지훈은 안도한 듯 웃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우연이 데려온 재회였지만, 지금의 우연은 오래전의 약속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오후의 빛이 창틀을 지나 테이블을 건너 두 사람의 손등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며칠 뒤, 은경의 식탁 위에는 하늘색 컵이 하나 더 놓였다. 첫 주에는 커피만 마셨고, 둘째 주에는 동네 빵집의 스콘이 곁들여졌다. 말은 조금씩 길어졌고, 웃음은 조금씩 낮아지며 깊어졌다. 서랍에서 꺼낸 옛 엽서에는 짧은 문장이 하나씩 더해졌다.
오늘의 핑크, 진짜 다짐.
오늘의 하늘, 여유라는 맛.
벚꽃이 마침내 터진 날, 둘은 단지 앞 벤치에 앉아 각자의 컵을 들었다. 바람이 꽃잎 하나를 데려와 컵 가장자리에 가만히 얹어두었다. 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핑크빛이 너랑 여전히 잘 어울린다.”
은경도 웃었다.
“너도 하늘빛이 잘 어울려.”
둘은 과거를 확인하느라 새로움을 놓치지 않기로, 미래를 서두르느라 현재를 흘려보내지 않기로 조용히 마음을 모았다. 컵에 남은 금처럼, 언젠가 다시 흔들리는 날이 오더라도 그 흔들림마저 하나의 결로 남을 수 있도록.
저녁이 내릴 무렵, 은경은 부엌 불을 끄고 핑크색 컵과 하늘색 컵을 나란히 건조대에 올려두었다. 물방울이 금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녀는 오래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창밖으로 분홍빛이 번지고 있었다. 십 년 전의 봄과 닮았지만, 같은 계절은 아니었다. 따로 만들어진 두 개의 컵은 오래 돌아와 다시 곁에 놓였다. 은경은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