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이 필요해

시제 : 혼잣말

by seo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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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려는지, 퇴근길 하늘이 하루 종일 참았던 얼굴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지윤이는 우산도 없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가방은 무겁고, 어깨는 뻐근했고, 휴대폰 배터리는 8퍼센트였다. 회사 단체 채팅방에는 퇴근 직전까지도 메시지가 올라왔다. “내일 오전 회의 자료 수정 부탁드립니다.” “지윤님, 이 부분 다시 검토 가능할까요?” “오늘 중으로 공유 부탁드려요.”


오늘 중으로.
가능할까요.
부탁드려요.


사람들은 참 다정한 말로 사람을 지치게 했다.


지윤이는 버스가 오기도 전에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하지 뭐. 다 하지 뭐.”


제 귀에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말을 뱉고 나니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말로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 와서야 겨우 낼 수 있는 항복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지윤이는 원래 혼잣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나야지.”
양말 한 짝이 안 보이면 “분명 여기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늦게 오면 “천천히 와도 돼.”
회의실 앞에서는 “긴장하지 말자.”
퇴근길에는 “조금만 버티자.”


누가 들으면 민망할 만큼 사소한 말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소한 말들이 없으면 하루가 더 버거웠다.
세상은 너무 빨리 돌아가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 몫의 친절을 자주 잊었고, 그럴 때 지윤은 제 몫의 다정을 스스로에게 건네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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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도착했고, 사람들은 익숙한 표정으로 밀려 들어갔다.
지윤이는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창밖을 봤다.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이 낯설었다. 예전보다 초췌해진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원래 이랬는데 이제야 제대로 보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때, 아주 작은 소리로 또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오늘도 수고했네.”


누가 들을까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의 혼잣말에 관심이 없었다.
다들 자기 마음속 소음 듣느라 바쁘니까.


집에 도착했을 때는 결국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윤이는 어깨를 웅크린 채 골목을 걸었다. 오래된 빌라의 계단은 눅눅했고, 현관 앞 전등은 반쯤 깜빡였다. 열쇠를 찾다가 가방 안에서 구겨진 영수증과 립밤, 볼펜 두 자루, 다 먹은 사탕 봉지를 한꺼번에 꺼냈다.


“정리 좀 하고 살자.”


중얼거리며 문을 여는 순간, 맞은편 302호 문이 열렸다.
백발의 할머니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오다가 지윤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고, 퇴근했어요?”


“네, 안녕하세요.”


“비 맞았네. 얼른 들어가서 따뜻한 거 마셔요.”


할머니는 그렇게 말해 놓고, 제 발치의 쓰레기봉투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걸 왜 이렇게 무겁게 만들었담.”


지윤이는 순간 피식 웃었다.
할머니도 혼잣말을 하시는구나.


그날 밤, 지윤이는 노트북을 켜고 회사 일을 조금 더 하려다가 결국 그대로 엎드려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새벽 두 시쯤, 윗집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벽과 천장을 타고 내려오는, 말인지 숨인지 모를 작은 소리였다.


“아이고, 괜찮아. 천천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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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이는 눈을 떴다.
그리고 가만히 누워 그 말을 다시 들었다.


“다 할 필요 없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노인의 목소리 같았다.
혼잣말이었다. 분명.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나 혼자만 이렇게 중얼거리며 사는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누군가는 밤중에 설거지를 하며, 누군가는 빨래를 개며, 누군가는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제게 들릴 만큼만 작은 목소리로 자기를 달래며 사는구나.


그날 이후로 지윤이는 가끔 집 안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아랫집 아이는 문제집을 풀며 “아, 이건 알 것 같은데.” 하고 말했고, 옆집 청년은 현관문 앞에서 열쇠를 찾으며 “아 또 어디 갔어.” 하고 중얼거렸다. 302호 할머니는 택배 상자를 뜯으며 “잘 왔네, 잘 왔어.” 하고 말했다.


아무도 대단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내기 위한 말.
자기 하루를 자기 손으로 조금씩 붙들기 위한 말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지윤이는 드물게 늦잠을 자고 늦은 오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우유를 사 들고 돌아오는 길에 302호 할머니가 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 걸 봤다. 양손에는 화분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할머니, 제가 들어드릴게요.”


“아이고, 괜찮은데.”


“괜찮지 않아 보이세요.”


지윤이 웃으며 화분을 받아 들자 할머니도 따라 웃었다. 둘은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화분에서는 젖은 흙 냄새와 풀 냄새가 났다.


“이 꽃이 뭔지 아세요?” 할머니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제라늄이에요. 잘 죽지도 않고, 또 잘 살아나고 그래.”


할머니는 숨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사람하고 좀 비슷해.”


지윤이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잘 죽지도 않고, 또 잘 살아나고.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찬란하거나 거창하지 않아서 더 오래 남는 말.


화분을 현관 앞까지 옮겨 드리자 할머니가 말했다.


“차 한 잔 하고 갈래요?”


지윤이 잠깐 망설였다. 해야 할 일이 떠올랐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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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호 안은 오래된 집 특유의 냄새와 함께 따뜻한 생강 향이 났다. 거실 창가에는 화분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손주들 사진인지 가족사진인지 모를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할머니는 천천히 차를 따르며 말씀하셨다.


“혼자 살면 자꾸 말이 늘어요.”


지윤이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할머니는 꼭 지윤이의 마음을 들여다 본 사람처럼 웃었다.


“혼잣말이요?”


“응. 처음에는 심심해서 했지. 냄비에 국 올려 놓고 ‘넘치면 안 된다’ 하고, 세탁기 돌리면서 ‘이번엔 좀 깨끗해져라’ 하고. 그런데 살다 보니 알겠더라고. 사람이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기 목소리가 필요해.”


지윤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자기 목소리요?”


“누가 안아주고 토닥여주면 좋지. 그런데 늘 그럴 수는 없잖아.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니까. 그럴 때 자기를 제일 오래 지켜보는 건 자기 자신이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나한테라도 말해줘야지. 괜찮다, 잘했다, 조금 쉬어도 된다.”


할머니는 찻잔을 내려놓고 한 번 웃었다.


“남이 해주는 위로는 늦을 때가 많아. 근데 내가 나한테 해주는 위로는 바로 할 수 있거든.”


그 말이 지윤이의 가슴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바로 할 수 있는 위로.
그런 건 한 번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지윤이 한참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요, 혼잣말 많이 해요.”


“알아요.”


“네?”


“계단에서 몇 번 들었어. ‘괜찮아’, ‘버티자’, ‘할 수 있어’.”


지윤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할머니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민망하라고 한 말 아니에요. 오히려 반가웠어. 아, 이 사람도 자기를 데리고 하루를 건너고 있구나 싶어서.”


지윤이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봤다. 차 표면에 작은 빛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보고 있자니 괜히 울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일은 이상했다. 아주 큰 사건도 아닌데, 오래 참고 있던 것이 슬며시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가끔은요.” 지윤이 천천히 말했다. “제가 저한테 하는 말도 잘 안 믿겨요. 괜찮다고 해도 안 괜찮고, 괜찮아질 거라고 해도 하나도 안 괜찮아질 것 같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말이 약할 때도 있어.”


“그럼 어떡해요?”


할머니는 창가의 화분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대답했다.


“그래도 해. 믿기지 않아도 해. 물 준다고 당장 꽃이 피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주잖아. 말도 그래.”


그날 집으로 돌아온 뒤, 지윤이는 오래도록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창밖에선 빗소리가 잦아들고 있었고, 방 안은 조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적막하지는 않았다. 마치 어딘가에 아주 작은 불빛이 켜진 것 같았다.


지윤이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가 자주 하는 혼잣말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일어나자.
천천히 해도 돼.
오늘도 여기까지 왔네.
많이 힘들었겠다.
울어도 괜찮아.
잘하고 있어.
지금 당장 다 해결하지 않아도 돼.
오늘을 보낸 것만으로도 충분해.


문장들은 단순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적어 둔 말들은, 누군가에게 받은 긴 위로의 편지보다 오래 남았다.
어쩌면 사람은 남의 말보다 자기 목소리로 더 깊이 살아나는지도 몰랐다.
자기 안쪽에서 들려오는, 남에게 보여줄 필요 없는 다정한 목소리.
“괜찮아.”
“조금 쉬자.”
“그래도 너는 여기까지 왔어.”


며칠 뒤, 회사에서 큰 실수가 있었다.
지윤이의 잘못만은 아니었지만, 가장 먼저 사과한 사람도, 가장 늦게까지 남아 수습한 사람도 지윤이었다. 밤 열 시가 넘어 사무실을 나왔을 때, 지윤이는 버스 정류장 유리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멍하니 봤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그때 예전 같았으면 “왜 이렇게 못하니”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오늘 많이 놀랐지.”


지윤이는 제 말에 스스로 조금 놀랐다.


“그래도 끝까지 했네.”


목이 메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눈물이 핑 돌았다.


“수고했어.”


아주 평범한 말인데, 그날은 그 말이 이상할 만큼 지윤이를 붙들었다.
버스가 올 때까지 지윤은 몇 번이고 속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수고했어.
정말 수고했어.


집에 도착하니 302호 현관 앞에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화분 옆에는 조그만 쪽지가 있었다.


지윤 씨 주려고 하나 나눠놨어요.
잘 안 피는 날도 있지만, 뿌리는 자라고 있대요.


지윤이는 한참 그 문장을 바라봤다.
잘 안 피는 날도 있지만, 뿌리는 자라고 있대요.


그날 밤, 지윤이가 화분을 창가에 올려두고 물을 조금 줬다.
그리고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향해, 아주 천천히 말했다.


“오늘도 살아줘서 고마워.”


누가 들으면 우스울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윤이는 이제 알았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부서지지 않지만, 생각보다 자주 금이 간다는 것을.
그래서 가끔은 거창한 해결보다 작은 말 한마디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다 괜찮아질 거라는 장담이 아니라, 괜찮아질 때까지 곁에 있겠다는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혼잣말은 외로운 사람의 버릇이 아니라,
자기를 끝내 놓지 않으려는 사람의 다정함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그 다정함 하나가 사람을 살린다.


아주 조용히.
아주 오래.
아무도 모르게.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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