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래된 미래'는 우리가 만들
이 한 장의 사진
교황의 선종으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나는 낯선 기사와 마주했다. 교황의 관 옆으로 사제들과 조문객들이 보이고 검은 복색의 수녀 한 분이 서 있는 사진이었다. 배낭을 등에 멘 수녀를 ‘찐친 수녀’라고, 이례적인 장면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기사가 사족처럼 붙어있었다. 낯선 장소에 어울리지 못하고 배낭조차 의탁할 형편이 안되는 수녀의 신분을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느껴져 씁쓸했다.
그 사진으로 인해 로마 교황청과 가톨릭 세계에서는 여전히 성별 위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녀는 미사를 집전할 수 없고 언제나 신부를 보필하는 존재로 만족해야 하는 신분 말이다. 2년 전 페루의 산골 마을을 지나가다 수녀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미사를 드릴 때면 외부에서 은퇴한 신부를 모셔온다고 했다. 신의 말씀을 꼭 ‘파드레’들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하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그럼 인도에서 시작되고 중국을 거쳐서 한국에서 꽃을 피웠다는 불교는 평등한가.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대한불교보문종)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는 비구니의 지위는 어떨까?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전국의 유서 깊은 사찰을 재건하고 태고종과의 분규 이후 조계종이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비구니의 처지는 나을까? 2,700년 전의 비구니 팔경계에 따라 “출가한 지 100년이 된 비구니라도 하루 된 비구를 보면 예를 표하라”라는 계율이 있다니 전통과 관습을 붙잡고 있는 건 여전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식에서 들러리에 머무는 수녀의 지위와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비구니의 지위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일부 기독교에서는 여성 목회자를 인정하고 동성혼도 축복하고 있지만, 가부장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종교 대부분은 보수적이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1인 신앙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불교적 성격의 명상과 기독교적인 사랑, 이슬람적인 자기절제를 혼합하며 가치관으로 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지인의 소개로 2012년에 만들어진 <인류멸망 보고서>라는 영화를 최근에 보았다.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 깨달음을 얻어 신이 되자 인간들이 두려워한다는 내용이다. 그때보다 더 섬세해진 기계문명에 나약한 인간인 우리는 갈수록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지구를 넘나드는 안드로이드와 AI 시대에 유연성과 포용력을 망각하고 있는 종교는 더욱 설 자리가 줄어들 것이다.
어느 때보다 더 인간성을 위로받고 영적인 존재가 필요한 지금, 또다시 우리를 구원할 존재를 찾아 나서야 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혐오와 배제가 아닌 서로를 인정하고 개인의 성장을 지원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종교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