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10월

도서관

by 살로메

건전하고 알찼던 나의 시간들, 매일의 일상을 기록했던 좋은 습관은 어디 가고 핸드폰의 노예가 된 나를 발견한다. 여가시간은 곧 유튜브 시청으로 이어지는 나쁜 패턴을 끊어내고자 나는 동네 도서관에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자원봉사를 구한다는 공지를 알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기록하려고 급하게 이면지를 찾다가 종이류 재활용상자에서 발견한 앞면이 오늘 날짜의 모집공고였다. 도서관측에서 버린 걸까? 아니면 신청자가 단독 지원하기 위해 증거를 없애려 한 걸까? 궁리를 하다가 물어보니 추가 신청가능하다고 한다. 오호, 도서관에서 심신을 수양하라는 하늘의 게시라고 생각한 나는 금`토`일 오전에 4시간씩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다. 1만 5천 원의 4시간 활동비도 지급된다는 것을 알고 이건 필연이라 생각했다.


직원이 지원서를 작성하라고 내밀며 "전에 도서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대답했고 신청서를 제출하고 생각해 보니 경험이 있었다. 처음 떠오른 기억은 10년 전 대학교 도서관에서 시급 1만 2천 원을 받고 면학장학생으로 활동한 경력이었다. 1년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당시 시급이 6천 원이었는데 힘들지 않게 근무할 수 있는 고수입이었다. 도서관의 어마 어마한 철학서와 인문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지적 허영을 채워주기에 충분했고 통창의 채광이 카페뷰 부럽지 않았다. 그때의 도서대출 업무는 여태껏 만족도가 가장 높은 알바였다.


책에 대한 과거를 회상하다가 나는 국민학교 4학년 시절이 생각났다. 어떤 과목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에베레스트 산과 관련한 지명이 등장하는 교과서였다. 담임선생님은 돌아가며 읽기를 시켰는데 떠듬떠듬 읽기도 힘든 외래어 때문에 같은 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얼굴이 빨갛게 되어 자리에 앉은 기억이 난다. 그 후로 한글도 못 읽는 저능아 취급을 받으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렇게 학교성적은 하위권에 머물렀고 내성적인 아이로 사춘기를 견뎌냈다. 수도국산의 꼭대기에 살던 나와 송림시장 입구에 살던 이모네 맏딸은 나이가 비슷해 자주 비교 당했다. 2부제 공립학교를 다니던 열등생인 나는 사립학교를 다니는 이모네 딸에게 은근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 시절에 유치원을 나왔던 수재와 비교하다니.. 그럼에도 맏딸을 비교하는 친척들 사이에서 부자였던 이모네 딸을 돋보이게 하려고 없는 집 자식인 나를 언급했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이모네를 멀리했지만 연못이 있는 2층 한옥집과 가족모임이 있는 날의 맛난 음식들은 포기하지 못했다. 그 집에 진열된 검은색 양장본의 세계문학전집 100권은 재력을 뽐내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었다. 가끔 이모네 집에 들러 한 권씩 빌려 읽었던, 아무도 펼치지 않아 책 끝 모서리가 한 덩어리로 붙어있던 책장을 손이 베지 않게 한 장씩 떼어가며 소설을 읽던 기억이 소심한 복수로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86년, 용현동의 대기업 공장에 취업을 했다. 잠깐 노무과(인사과)에 근무를 했는데 영어회화를 하던 어학실을 도서관과 같이 운영한다며 나에게 도서관 사서업무를 맡겼다. 월급 13만 원 받던 시절에 동인천 대한서림에서 67만 원어치의 도서를 구입하는 상황이 펼쳐졌는데 서점직원들에게 VIP 대접을 받으며 책을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도서카드를 만들고 서가에 진열하기도 벅찬 어느 날, 도서목록을 점검한 대리가 노동 시를 쓴 책을 나에게 찾아서 폐기하라고 했는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갈기갈기 찢어진 책을 쓰레기통에서 발견하고 이것이 노동운동이 한 참인 시절의 불온서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 대리는 30년 후에 '빨간점퍼'의 시의원이 되어 강화에서 활동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의 어린시절은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글 읽기를 좋아했고 도서 구입과 서가정리의 사서업무도 맡아서 했었다. 대학교에서 대출업무도 해봤던 경력자였다는 것을 이번 자원활동을 하면서 기억해냈다는게 신기하다. 내 기억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건ㆍ사고들이 저장되어 있을까? 이제는 가지 않은 길 보다 가 본 길을 더듬어가는 시간이 기대되는 가을이다!


대출되었다가 돌아온 책들의 제목과 저자를 훑어보며 내가 읽었던 책인지 살펴본다. 연필로 낙서된 곳의 문장을 읽으며 대출자는 어디에 꽂힌걸까 궁리도 하고 책갈피로 사용된 메모지와 컬러 띠지를 살펴 본다. 가끔 나 처럼 완독하지 못하고 반납하는 사람들을 위해 메모지와 띠지를 책 속으로 숨기기도 한다. 이런 작업속에서 나의 꿈도 현실이 되기를 지금은 땅속의 씨앗을 돌보는 시간이라 생각하니 쌀쌀해진 기온이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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