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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Jul 29. 2019

누가 나를 호구로 만들었나

내 돈 쓰고 호구 되는 일은 이제 그만두겠습니다.

올여름은 평년보다 시원해서 그나마 견딜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다른 이유로 대한민국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타국에서 한국을 호구로 보는 일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 있었던 일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요즘 유달리 그런 게 눈에 띈다. 국가의 삼 요소를 국민, 영토, 주권이라고 하는데 작금의 상황을 보면 그들은 한국인을 호구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한국인은 막 대해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게 여실히 느껴지니까 말이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당장 한 푼이 아쉬웠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1960년대, 70년대 서독으로 파견 나간 광부가 8,000여 명, 간호조무사가 11,000여 명 이라고 한다. 1963년에 1차로 500명의 광부를 모집했을 당시 46,000명의 지원자가 몰렸는데 그중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들이 다수였단다. 경쟁률로 치면 100:1인데 작년 서울시 9급/7급 공무원 경쟁률이 62:1이란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머나먼 타지로, 그것도 땅속 깊은 탄광에서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고된 일이라도 하겠다고 말이다. 어쩔 수가 없었을 게다. 그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었으니.


지금은 사뭇 다르다. 여전히 돈 벌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외형을 보면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조선일보에 실린 ‘한국인, 해외여행 지출 큰손 6위...1위는 미국인’(2019.7.23.)이라는 기사를 보면 한국인 여행객의 지출 규모는 전체의 3.4%로 미국, 중국, 독일, 영국, 프랑스에 이어 6위다. 3.1%를 차지해 7위에 오른 일본보다도 순위가 높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18년에만 약 2,800만 명이 해외여행을 갔다고 한다. 적어도 통계만 놓고 보면 먹고살 만해 진 나라임이 분명하다. 대개 돈 쓰는 사람은 우대를 받기 마련인데 한국인은 결코 돈을 적게 쓰지 사람들이 아님에도 호구 취급을 받는다.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내 돈 쓰면서 설마 호구 취급 당할 줄은 몰랐네


내 돈 쓰면서 호구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지출하는 분야에 대한 지식이 일천할 때다. ‘내가 고객인데 알아서 잘해주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집 밖을 나서면 순식간에 호구 되는 세상이다. 한동안 욕을 먹던 전자상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친구 한 명이 몇 년 전 안경원을 열었을 때 일이다. 친형이 인테리어를 해서 아무래도 형제가 낫지 싶어 견적을 맡겼다고 한다. 예상보다 많이 나와 업체 몇 군데를 불러 비교 견적을 요청했더니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가격 차이가 났단다. “아우, 그 새끼 그럴 줄 알았어.” 다들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사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눈 뜨고 코 베이는 걸 어디 한두 번 봤던가.


둘째, 너무 가성비만 따질 때 그렇다. 처음 경영학원론을 배우던 날,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라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곧이곧대로 듣지 말았어야 했다. 살아보니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매우 감성적이고 감정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너나 할 것 없이 합리적으로 소비하고 남은 돈으로 저축했으면 노년에 불안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러나 실상은 노년의 안정된 생활은 둘째 치고 마케팅에 속아 긁어버린 막대한 카드 값 때문에 당장 다음 달 걱정이 앞서지 않던가. 그놈의 나심비 때문에 정작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살 때면 두 눈을 부릅뜨고 가성비를 찾아 나서는 아이러니. 가성비 앞에는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없다. 나를 여러 번 조롱한 사람이 판매하는 제품이라도 가격 대비 훌륭하다면 기꺼이 지갑을 열던 소비행태. 누구 탓할 것도 없다. 당장 내가 그래왔으니.

  

첫 번째 경우는 내가 지식을 쌓으면 해결된다. 아무리 판매자의 말발이 좋아도 내가 제품에 대해 잘 알면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으니까. 하다못해 조금만 더 발품 팔아도 덜 호구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두 번째 경우인데, 이유는 가성비의 경우 알면 알수록 더 깊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뭐가 좋은지 뻔히 보이는데 굳이 다른 제품을 사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니까. 따라서 가성비 때문에 호구가 되는 문제는 이성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차라리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의 자세랄까.


가성비는 잊고 이제 새롭게 시작해 보자

  

이 무슨 유치한 발상인가 싶겠지만 사실 이런 유치한 일을 가장 잘하고 있는 민족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유대인들이다. 지금은 이스라엘과 독일의 관계가 좋아졌지만, 여전히 독일제품이라면 쳐다보지도 않는 유대인들이 많다. ‘Made in Germany’ 제품이 좋다는 걸 그들이라고 모를까. 하지만 그들은 그보다는 자기들의 자존심을 지킨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에게 함부로 대한 자들이 성의껏 사과하기 전까지는 상대도 하지 않겠다는 자존심 말이다. ‘그깟 자존심이 뭐 대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 자존심 때문에 유대인들은 긴 세월 동안 나라 없이도 무시당하지 않고 살았다.


유대인의 막대한 부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도 매년 인구의 반이 해외여행을 가고, 해외지출액도 세계 6위일 정도로 잘 사는 나라이지 않나. 심지어 머리도 좋다. 유대인 다음이 한국인이란 기사도 여럿 봤으니까. 그런 한국이 유대인과 달리 호구가 된 데는 분명 가성비로 놓친 자존심 때문이리라. 물론 가슴이 아닌 머리가 앞서야 하는 분야도 분명 있다. 국가나 기업처럼 얽히고설켜서 고려해야 할 사안이 워낙 많은 곳 말이다.  그런 곳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처럼 평범한 개인은 다르다. 내가 호구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과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대놓고 나를 호구 취급하는데도 모른 척 한다면 무엇보다 나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남들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소한 무시당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가성비나 나심비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요즘 들어 대놓고 한국을 그리고 한국인을 호구로 보는 이들 때문에 자존심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특정 국가나 기업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들만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앞으로 나를 호구로 취급하는 모든 사람, 기업, 국가에 내 자존심을 내세우기로 다짐한다. 혹시 아나 국가의 삼 요소 중 하나인 국민, 그리고 국민의 한 사람인 내가 자존심을 지키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한국인의 자존심이 세워지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우뚝 서게 될지. 내 돈 쓰고 호구 되는 가성비와 나심비는 이제 사절이다. 이제부터는 나의 자존심을 지키는 ‘자존비’의 시대다.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독'과 '공유'는 작가에게 큰 이 된답니다 :)      


안치형 / 프리랜서 작가, 브런치 작가, 기업 블로그 마케터.
나에게 어울리는 인생, 후회없는 인생을 선택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나를 찾아가는 생각연습'을 출간했습니다. <네이버 인문 화제의 신간10>  <YES24 2019 여름 교양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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