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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Jul 21. 2019

진정한 신의 한 수

어쩌면 내 인생 빙고는 내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 빙고 게임만 한 20번은 한 것 같다. 아이와 내가 한편이 되어 아내와 게임을 했는데 아이의 표현에 따르면 심장이 두근두근 하단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아빠의 실력이 고만고만해서 거의 늘 동시에 ‘빙고’를 외치니까.


처음부터 나도 빙고 게임을 한 건 아니다. 며칠 전, 엄마랑 안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빙고 게임을 하던 아이가 갑자기 ‘으앙’ 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한 수 앞은커녕 당장 한 줄 긋기에만 급급한 아이가 어떻게든 엄마를 이겨보려고 온갖 생떼를 쓰다가 결국 처참하게 패배했나 보다. 자꾸만 까부는 아이에게 엄마가 본때를 보여줬으리라.


“엄마는 정정당당하게 했어.”라는 말을 남기고 아내가 잠시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아이는 훌쩍거리며 엄마 빙고 게임에 x 표시를 한가득해 놨다.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아이는 엄마가 '반치기'를 했다며 자기가 이긴 게임이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알아서 열심히 매를 버는 아이는 결국 엄마에게 한 소리를 듣고 더욱더 서러워져서 마루로 뛰쳐나왔으나, 이내 다시 엄마 품으로 파고들면서 “우앵!”

     

엄빠하고 게임을 할 때면 늘 자기가 이기려 드는 통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소동이 일어나곤 한다. 한참 훌쩍거린 후에도 기어이 빙고 게임을 더 하겠다는 아이를 보며 아내와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아이와 한 편이 되어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2차 대전은 시작되었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아이는 역시나 아무런 전략이 없었다. 눈앞의 한 줄에 온 신경을 뺏겨서 다음 숫자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으니까. “지금 이 숫자 부르고 싶지? 그거 하나면 한 줄 그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건 엄마가 부를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그거보다는 이 숫자를 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러면 다음에 이거도 한 줄, 저거도 한 줄 할 수 있잖아.” 잠깐 듣는 척하다가 또다시 눈앞의 한 줄에 시선을 뺏기는 아이. 원래 운전도 가족한테 배우는 게 아니랬는데. 참을 인을 한 4개 반쯤 그리다가 나도 모르게 폭발해 버렸다.


“그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어떻게 되는지?”     


알려줘도 도통 배우려 하지 않는 아이에게 짜증이 난 탓도 있지만, 한편으론 솔직히 내 실력이 의심되기도 했다. '정말 내가 알려준 대로 하면 빙고를 잘하게 되는 걸까?' 내가 무슨 빙고신동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루 3시간씩 꾸준히 빙고만 해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중간 정도 하다 보면 솔직히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세돌이 가르쳐 준다면 모를까, 그래 너 하고픈 대로 해봐라. 아빠가 무슨 정답을 알겠냐.     


막상 내가 가만히 있자 아이는 그동안 아빠 잔소리가 방해됐었다는 듯 거침없이 숫자를 불러나갔다. ‘아빠라면 절대 두지 않을 거야.’라고 그토록 강조했던 곳들부터 어쩌면 그렇게 쏙쏙 채워 나가는지. 그런데 어라, 예상외로 선전을 하네? 물론 끝까지 가면 보나 마나 엄마의 승리겠지만, 어쨌거나 조금만 도와주면 생각보다 금방 끝날 것 같았다. 중반까지는 정말로 가만히 지켜만 보다가, 이후에 몇 가지 숫자를 검지손가락으로 슬쩍슬쩍 가리켰다.



“빙고! 빙고! 빙고!!!”



헛, 아이가 승리하고 말았다. 그동안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승패를 주고받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동시에 빙고를 외치는 상황이 아닌 분명 여유 있는 확실한 승리였다. 게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입장에서, 아이한테 무슨 전략이 있었던 건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게임을 리드해 나갔다. 나라면 절대 부르지 않았을 숫자를 가지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 숫자들이 신의 한 수였다. 내가 알려준 대로만 하길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자 기가 막히게 찾아온 우연.


콩~그레~츄~~레이숑~~~콩 그레츄 레이숑!!!


     

분명 빙고도 많이 하다 보면 더 이상 운이 아닌 실력에 기대는 날이 올 게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내가 아이와 게임을 하면서 느낀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운은 게임을 하는데 참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갈고 닦아서 의식적으로 들이미는 신의 한 수도 분명 있겠지만, 진짜 신의 한 수는 이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잘 몰라’라고 인정하는 바로 그때 말이다. 이런 오묘한 수가 한 다섯 번만 내 인생에 찾아오면 그야말로 인생 ‘빙고!’ 외치게 될지도.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독'과 '공유'는 작가에게 큰 이 된답니다 :)      


안치형 / 프리랜서 작가, 브런치 작가, 기업 블로그 마케터.
나에게 딱 맞는 인생, 후회없는 인생을 선택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나를 찾아가는 생각연습'을 출간했습니다. <네이버 인문 화제의 신간10>  <YES24 2019 여름 교양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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