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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Oct 14. 2019

'헌신' 그리고 '가족의 행복'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이와 산에 올라간 이유

피곤한 몸으로 아이와 산에 오르다


유난히 피곤한 날이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저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 안식을 취할 생각만 간절하다. 따뜻한 굴속에서 한껏 몸을 웅크리고 겨울을 나는 동물처럼,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온몸에 들러붙은 피곤을 녹여내고 싶은 기분. 어제가 그랬다. 하지만 부모의 삶이 어디 부모만의 것이던가. 먹이를 잡아 온 부모의 노고는 아랑곳 않고 오로지 내 배만 부르면 마냥 행복한 아기 새처럼, 아이는 이제나저제나 뒷동산에 오를 생각만 한가득이었다.


“그래, 가자.”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몸을 일으켰다. 꾸덕꾸덕한 진창에 빠져버린 발을 가까스로 꺼내듯, 젖 먹던 힘을 다해 마지막 윗몸일으키기 하듯 억지로 억지로. 두 눈은 물론이고, 두 팔과 두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피로를 이끌고 집을 나섰다. 심지어 머릿속에도 가득 차버린 피로는 걸음마다 미풍에 잔물결 일으키듯 미세한 두통을 끊임없이 불러왔다. 그러든지 말든지 한껏 신난 아이. 한 시간 반가량 동산에 올라 땅에 떨어진 도토리도 만져보고, 이름 모를 열매도 보고, 낙엽 아래서 곤히 자고 있던 애벌레도 깨워보고. 그렇게 한 시간 반가량 천방지축 산을 누비고 나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란다. 때로는 벅찰 정도로 부모에게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기꺼이 내 생명의 일부를, 삶의 일부를 내어 주는 것은 그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다. 아이만 그럴까.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이와 같은 것을 원한다. 힘들지만 기꺼이 그 요청에 응할 때 가족은 비로소 화목해진다. 화목한 가정에서 나는, 아내는, 그리고 아이는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살아갈 힘을 얻는다.



아이에게 헌신한다는 것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 많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감동이었어요.’ ‘아빠로서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아이의 첫울음 이후로 계절이 수십 번 바뀌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는데,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헌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금방 흥미를 잃는 사람이, 내 몸 하나 겨우 건사하는 사람이 과연 이 아이가 요구하는 ‘완벽한 헌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육아가 시작되자 예상대로, 아니 예상했던 것 그 이상으로 아이는 나에게 굉장히 구체적이고 집요하게 헌신을 요구했다. 힘들 때 쉬지 못하고, 졸릴 때 자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게 있어도 참아야 하고, 여행은커녕 집 앞에 산책하러 나가려 해도 짐이 한 더미가 되어 버리는 상황이 이어지자 피곤했고 불편했다. 그나마 낮에는 회사에 가 있던 나도 이럴진대, 아내는 오죽할까. 최소한 나의 천배 아니 만배 이상은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어쩌랴. 혼자서는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는 아이인걸. 아이는 그런 존재였다. 이틀에 한 번씩 물 주고 볕만 충분히 쬐어주면 무럭무럭 자라서 탐스러운 열매까지 맺는 과실수와는 달랐다. 외출할 때 밥그릇에 물이랑 밥을 담아 놓고 배변할 장소만 마련해 주면 그만인 개나 고양이와도 달랐다. 저 스스로는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자다가 뒤집혀서 숨이 막혀도 스스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너무나 여리고 여린 존재였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헌신이 아닌, 1년 365일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헌신이 요구됐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두 명의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하와는 세상의 첫 번째 여자이자 엄마인 셈인데, 그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히브리어로 하바(חַוָּה) ‘생명을 주는 자’이다. 비단 아이를 낳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몇 년 동안 마음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는 아내를 보며 그제야 ‘하바’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해야 할 의무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어때


한때 내 삶에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나의 노력과 열정은 오로지 나를 향했다. 결혼 초기에도 그랬다. 사소한 변화야 없을 수 없겠지만 큰 틀에서 나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이를 키우면서 점차 내 노력의 대상이 바뀌었다. 물론 그 시작도 역시나 나를 위한 이기적인 마음에서 그랬을 수도 있다. 아내와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내게 유익이 되고. 아이의 칭얼거림을 달래 주는 것이 내게 자유를 허락하기에.


허나 반복은 이내 습관이 되는 걸까. 점차 나는 이타적인 남편, 아빠가 되어갔다. 밥 한 끼를 먹더라도 이왕이면 평소에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먹으려 하고, 도저히 눈 뜨지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한 번이라도 더 아이의 요구를 들어 주려한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존경받고 사랑받고, 챙김 받는 가장이 되었다. 행복한 가족이 되었다.



그렇다고 아이가 산에 가자고 했을 때 내가 즉시 일어난 건 아니다. “5분만, 5분만 있다가.”를 몇 번이고 외친 끝에 일어났다. 내가 하는 헌신이란 이렇게나 보잘 것 없다. 절대 완벽하지 않다. 단지 5년 전보다, 1년 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그 덕에 아이는 행복했고, 아내는 간만에 집에서 편히 쉬지 않았나. 어제 하루 또 우리는 또 행복했다. 이런 걸 희생이라 한다면 골백번도 더 할 수 있다.


여튼 쓰고 보니 모양이 좀 빠지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엔 절대 하지 않았을 헌신임에 틀림없다. 이 정도만 해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난 완벽할 수 없는 인간 아니겠나. 무엇보다 발전의 여지가 있으니 인간미 넘치기도 하고. 앞으로 더 좋은 아빠와 남편이 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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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형 / 프리랜서 작가, 브런치 작가, 기업 블로그 마케터.
여러 글로벌 기업에서 근무했고, 요리를 배우고, 창업을 하고, 전국 토론모임을 열어 수 백명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019년 6월. [나를 찾아가는 생각연습]을 출간했습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 담았습니다. <네이버 인문 화제의 신간10>  <YES24 2019 여름 교양 필독서>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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