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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Jan 28. 2020

내가 겪은 공황장애

거짓에 속지 말고 진짜를 바라보면 극복할 수 있다

순식간에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고 평소의 수배 속도로 심장이 뛰었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공포의 시작. 시공간이 우그러져 나를 죽일 듯 짓누르는가 하면, 빨갛게 치켜뜬 수백 개의 눈동자가 사방에서 나를 노려보기도 했다. 한껏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덮어도 도저히 가려지지 않던 그 눈동자들. 생명의 근원이었던 호흡은 이내 섬뜩하고 예리한 칼날이 되어 집요하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왜 이러는지.



심리학을 공부하다 알게 

2년 반 전, 나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토론모임을 열었다. 그 모임에는 수백 명이 참가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서로의 나이와 직업을 묻지 않기. 덕분에 꽤 진솔한 이야기가 오갔다. 즐거운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힘겹게 꺼낸 마음의 문제에 더 관심이 갔다.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 느낀 좌절감.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상실감. 깊은 우울. 방황.


모임을 정리하고 책을 한 권 썼다. 그리고 평생교육원에 등록하여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임상심리학을 공부하던 중에 불안장애가 나왔다. 불안과 공포를 주된 증상으로 하는 장애란다. 범불안장애는 쓸데없는 걱정 근심이 많을 때 나타난다고 한다. 광장공포증은 사람이 많은 곳에 못 가는 것이란다. 이어서 공황장애. ‘갑자기 강렬한 공포와 불안이 엄습함. 심하면 의식을 잃고 쓰러짐’ 문득 15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더 찾아본 후에 깨달았다. 내가 겪은 건 공황장애였다.


돌이켜보면 주위에 공황장애를 겪은 이가 여럿 있었다. 그래서 그 증상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대처법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불안이 찾아올 때면 나에게 전화하는 친구가 있었다.


“야, 나 또 시작이다.”


여지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친구. 하지만 그런 증세는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점차 수그러들었다. 경험에 비춰보면 공포감과 불안감은 저 혼자 갑자기 오지는 않는다. 트리거가 있다. 건강을 염려하다 시작되는 경우가 있었고, 누군가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경우도 있었다. 경력단절 후 불안함에서 오는 경우도 있었고, 영적인 이유도 있었다. 내 경우는 영적인 이유였다.



영의 세계는 존재하는가

누군가는 영적인 세계를 믿지만, 누군가는 턱도 없는 소리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적당히 관심은 있지만 깊이 들어가긴 시간 낭비라 생각하는 이도 있다. 쏘아 올린 로켓에서 떨어져 나간 연료통이 스스로 지구로 복귀하는 시대에 영을 논하면 너무 구식인 걸까. 워싱턴D.C에 본사를 둔 미국의 싱크탱크 Pew Research Center (퓨 리서치 센터)에서 2017년도에 발표한 ‘The Changing Global Religious Landscape (변화하는 글로벌 종교 환경)’를 보면 2015년 기준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인구가 총 52억 명이다. 나이롱 신자를 고려해도 세계인구의 절반을 훌쩍 넘는 사람들이 여전히 영적인 것을 믿는다는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의 경우 공황장애의 시작은 성경이었다. 당시 나는 미국에 있었다. 모두 출근하고 혼자 집에 있었다. 가만히 소파에 누워 있다가 문득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성경에 시선이 갔다. 그때부터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어릴 적 성당에서 세례도 받았음에도 그때까지 제대로 성경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습관적으로 예배드리는 선데이 크리스천일 뿐이었다. 우연히 쳐다본 성경. 미칠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 나는 뱀 앞에 선 쥐와 같았다.


자율신경계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소름이 돋았다. 공포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저 책을 보면 난 죽고 말 거야.’ 끊임없이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있는 힘을 짜내 겨우 집 밖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가족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놀이터에서 기다렸다. 다 큰 성인 남자가 말이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잠시라도 떨어지면 순식간에 공포가 들어찼다. 이를 닦을 때는 거실에 나왔다. 뜬 눈으로 머리를 감곤 했다. 그리고 잠잘 때. 불 끄고 홀로 침대에 누우면 어김없이 악몽 같은 시간이 시작됐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이대로는 죽을 것 같아 뭐라도 해야 했다. 누나에게 부탁해서 한인교회에 연락했다. 어떤 목사님이라도 좋으니 당장 뵙고 싶다며. 안타깝게도 모두 일정이 여의치 않았다. 간신히 며칠 후에 만나기로 했다. 몇 년 같은 며칠이 지났다. 약속 당일. 급한 일정이 생겨서 오늘은 힘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꺾였다. 마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어서 직접 교회에 가기로 했다. 정확한 위치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길을 헤매든 가다가 사고가 나든, 아무튼 무언가를 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시동을 거는데 목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오시겠단다.


여느 때처럼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렸다. 저 멀리 하얀 자동차가 보였다.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왔다. “네가 xx 동생이구나. 배고프겠다. 일단 어디 가서 점심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차에 올랐다. 전도사님이 시동을 걸었다. 차가 출발하기 직전, 목사님이 갑자기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다. 그러자 온몸에 전기가 흐르면서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두려움이 사라졌다. 어릴 적에 친구와 자주 하던 놀이가 있다. 손목을 꽉 쥐었다가 살살 풀어주면 손바닥에 전기가 오는 놀이였는데 그것보다 몇 배 강한 찌르르한 느낌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실로 오랜만에 평안함이 찾아왔다.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그날 아침 급히 공항에 나갈 일이 생겨서 약속을 미뤄야만 하셨단다. 그런데 기도 중에 나와 만나는 것이 더 급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이곳으로 오신 거라고 한다. 그렇게 만났고, 기도를 해주셨다. 기도로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며칠 후 다시 공포가 찾아왔다. 이번엔 더욱 격렬했다. 단지 마음으로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기도가 턱 막혀서 몇 초간 숨을 쉬지 못하기도 했고, 갑자기 손가락이 손등 쪽으로 꺾여 들어가기도 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손가락이 골절되거나 인대가 끊어졌겠지만, 다행히 상처하나 남지 않았다. 증세만 보면 더욱 심각해졌지만, 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의지할 것이 없을 때의 두려움과 그렇지 않을 때의 두려움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결국 지나갈 것이다.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


용기를 내어 성경을 읽었다. 일주일 만에 성경 일독을 했다.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다면 알겠지만, 일주일에 성경 일독을 하려면 하루에 6~7시간 동안 성경만 읽어야 한다. 물론 이해하지 못하고 넘긴 내용이 태반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쳐다만 봐도 죽을 것 같았던 성경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읽는다는 것 자체로도 엄청난 진전이었으니. 벌써 15년 전의 이야기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얼마나 좁은가

지금까지 인류가 이룬 것은 언뜻 대단해 보인다. 하지만 우주의 끝은 고사하고 당장 지구 중심의 근처도 가지 못하는 게 과학기술의 현주소다. 그보다 얕은 심해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으며, 활짝 열려있는 지표면에 사는 생물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시간과 자본을 쏟아부어도 다음번 지진이 어디서 일어날지 누구도 예측하지도 못하며, 번개가 어떻게 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달의 뒷면도 보고 화성에도 한 발짝 다가섰다지만, 여전히 우리는 다음번에 어떤 독감이 유행할지 알지 못한다.


사람은 초음파를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실재한다. 자외선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실재한다. 사람의 감각기관으로는 세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들을 수 있는 소리도, 볼 수 있는 빛도 다른데 정신이 팔려있으면 알아채지 못한다. 별로 탁월하지도 않은 감각기관과 쏟아지는 정보로 늘 분주한 뇌.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영적인 세계는 실재한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감각기관 너머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 세계에서는 사람의 영혼을 두고 치열한 주도권 싸움이 벌어진다.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오직 두 세력이 있을 뿐이다. 영혼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세력과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세력. 뉴스에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알고들 있는 사실이며 인류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떡하니 실려 있는 이야기다. 신과 악마. 그 존재를 믿고 말고는 개인의 자유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그것은 존재한다.



거짓의 아비 사탄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트리거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것은 병원에서의 치료를 요한다. 하지만 그중에는 분명 영적인 것도 있다. 영의 세계에 속한 세력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중 우리를 바른길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세력의 수장을 사탄(Stan)이라 부른다. 성경은 사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한복음 8:44)


15년 전 나는 대인관계에 문제도 없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었다. 지금도 종합검진을 받으면 스트레스 지수는 지극히 정상이고 우울 증세는 ‘0’이 나온다. 그런 내가 성경을 보고 공황장애가 시작되었다. ‘저 책을 보면 난 죽고 말 거야. 이럴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모두 거짓이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도 죽지 않았다. 상상해보지도 못한 경험을 했지만 죽기는커녕 몸에 티끌만 한 상처하나 남지 않았다.


영적인 요인으로 시작되는 공황장애가 아주 교묘한 것은 그 원인은 지각할 수 없으나 현상은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심장이 평소의 몇 배로 뛰고, 숨은 100m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차오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다. 침이 바싹 마르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심지어 신체의 일부가 평소 가동범위를 넘어 움직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 했던 부정적인 생각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내 모든 감각기관이 ‘이건 진짜야’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 그랬다. 현재란 없다. 무언가를 자각하는 순간 이미 과거의 것이고 나머지는 미래의 것이다. 따라서 거짓 속삭임도 과거와 미래를 다루는 경향이 있다. 한때의 실수를 집요하게 물고 넘어지면서 죄의식을 건드리곤 한다. 그랬던 네가 어디서 착한 척이냐며. 언젠가 너의 잘못이 만천하에 드러나 대가를 치르고 말 것이라며. 미래에 대한 거짓말은 경우의 수가 더욱더 많다. 당장 부족한 것 혹은 아쉬운 것, 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의 소재가 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지금 이 정도로 사는 걸 보니 앞으로는 희망이 없다거나, 연인과 자꾸 다투는 걸 보니 보나 마나 결혼해도 이혼할 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자녀들은 아주 불행하게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을 들 수 있다. 몸에 통증이 있어서 검색해 보니 99% 에이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병으로 인한 고통은 둘째 치고 다른 이가 알게 될 때의 그 수치스러움이 마치 실재처럼 느껴지면서 그 모든 것을 겪을 바에 차라리 지금 목숨을 끊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확정된 것처럼 꾸미는 가증한 거짓말이다.    



위조지폐를 구별하는 방법은 진짜를 제대로 아는 것

거짓은 그 종류가 워낙 다양해 A4용지에 써서 쌓으면 달에 닿을지도 모르겠다. 일일이 대응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믿음의 조상 중 한 명인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이 있다. 위조지폐를 잘 알아보는 법은 더 많은 위폐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 한다. 거짓에 속지 않으려면 진짜를 제대로 알면 된다. 영의 세계는 존재한다. 하나님은 존재하며 그 적대자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미 끝난 게임이다. 사탄은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한 명이라도 더 꾀려고 하는 중이다.


혹시 영적인 문제로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면 이 성경 구절로 용기를 얻었으면 한다. 당신이 어떤 죄를 범했든 상관이 없다.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편 86:5)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악한 영은 호시탐탐 우리를 속인다, 거짓에 속지 않아야 한다. 속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작은 상처도 나지 않는다. 생생한 두려움도 시간이 지나면 눈 녹듯 사라진다. 하늘을 보라. 희망을 얻어라.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 분별하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1,2)



안치형 / 브런치 작가

[출간]

2019.6 [나를 찾아가는 생각연습]


[브런치]

2020.01 [말근수필] 매거진

2019.03 [궁극의 행복 나로 살아가기] 매거진

2019.05 [일상의 기록] 매거진

2019.11 [나를 둘러싼 모든 숨들] 브런치북

2018.12 [50가지 시선의 차이]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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