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이 죽임당하는 보잘것없는 목숨을 흔히 파리목숨이라 한다. 하루살이에 비하면 파리는 양반이다. 하루살이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끽해야 2~3일밖에 못살지 않나. 제 딴에는 힘써 태어났을 텐데 고작 며칠 살고 죽는다니. 이렇게 허망할 수가 없다. 사람 목숨은 어떨까. 사람은 보통 80세 중반 정도 살다 간다고 한다. 그나마 사고당하지 않고 남들 하는 만큼 건강 챙기면서 살 때 그렇다는 말이다. 파리나 하루살이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싶다. 누군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할 수만 있다면 저도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내가 사람으로 살아보니 수명이 차고 넘치도록 넉넉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수수 스러져가는 이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파리채 들고 죽일 듯 쫓아오는 이도 없고 하루 이틀 지나면 시름시름 앓는 것도 아닌데,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하루를 보낼 것이 틀림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가 없다.
평균수명과 비교하면 나는 이제 막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 운이 좋아 남은 수명을 다 채운다면 앞으로 40년 남았다. 길다면 길다. 하지만 솔직히 그리 길어 보이진 않는다. 새해 인사 나눈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도 다 지나가지 않았나. 한 달이 그토록 빨리 지나간다면, 3개월이라고, 6개월이라고 빨리 가지 않으리란 법 있나. 왠지 올해는 봄도, 여름도, 가을도, 그리고 겨울도 작년보다 빨리 맞이하게 될 것만 같다. 뭐가 그리 급해서 빨리 달려가는지.
앞으로 40년. 이제 와 내 남은 날을 세어보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먼저 떠오르기로는 농밀함이다. 남은 날을 안다면 즐거운 한때를 더욱 진하게 보내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해도 더욱 사랑할 것이고, 여행을 가도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보려 할 것이다. 만약 우리의 사랑이, 여행이 오백 년간 지속한다면, 당장의 기쁨을 차일피일 미룰 것이 뻔하다. 늘 있는 일이라면 귀한 줄 모를 테니. 아이 얼굴에 스치는 미소 한번 보겠다며 아이에게 갖은 재롱을 부리는 부모는 분명 그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리라.
남은 시간을 알면 아무리 슬픈 일도 담담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매일 수고해야 하는 것이나 소중한 이와 이별하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참 좋으련만 이 슬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살면서 시험에 떨어지고, 경쟁에서 지고, 가까운 이와 멀어지는 것이 어디 한두 번 일이던가.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지 않고 씩씩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건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기 때문은 아닐 게다. 우리는 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진리를. 그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견디어 낸다.
그러므로 끝을 안다는 건 축복이다. 즐거운 시간을 농밀하게 즐길 수 있게 해주고, 슬픈 시간을 담대히 헤쳐나가게 해주는 축복이다. 남은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집중해야 할 대상도 뚜렷해지기 마련. 그동안 살면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나. 10년 주기로 그 대상이 바뀌었던 것 같다. 10대 때는 공부였다. 20대 때는 벗들과 어울리는 것이었고, 30대 때는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내 활동반경 내에서 최대한 성공하는 것.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했다. 좁은 시야로 혈기왕성하게 환상을 좇아온 시간이었다. 열심히는 살았다. 하지만 현명하진 못했다.
남은 40년. 나는 어떻게 살면 좋을까. 숭숭 뚫린 넝마 쪼가리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바느질 구멍조차 찾을 수 없는 귀한 비단 같은 시간을 보낼 것인가. 하늘 아래 무엇도 스스로 자라지 않는다.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라는 잡초도 새벽의 이슬과 한낮의 태양 빛을 먹고 자라지 않던가. 하물며 지혜야 말해 무엇 하랴. 지혜는 스승에게서 비롯된다. 누구를 따를 것인가. 그때그때 다르고 지나면 사라질 것을 말하는 스승을 따를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진리를 알려주는 스승을 따를 것인가. 결코 늦은 때란 없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지금, 나는 이제라도 부지런히 후자를 따라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