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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살랑 Mar 05. 2024

라구소스 리가토니가 뭔지도 모르면서


가족 드라마 장르의 책이나 영화 등을 싫어한다. 부모가 목숨까지 희생하며 자식을 지키는 이야기, 자식이 부모의 그런 사랑을 깨닫고 뒤늦게 오열하는 이야기. 아프신 부모님이 자식이 걱정할까 봐 거짓말하는 것도 싫고 그러다 세상을 떠나서 남은 자식들이 모진 말을 뱉었던 자신으로 인해 가슴을 치는 것도 싫다. 부모자식 간에 가슴을 울리는 절절한 사랑이야기 같은 건 다 싫다.


브런치 스토리에는 음식 이야기가 많이 올라온다. 엄밀히 말해 그것들은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 드라마다. 친정(혹은 시)부모님이 바리바리 싸주시는 반찬들, 겨울 특히 김치들. 가슴이 뭉클고 아름다며 부럽다고 솔직히 댓글도 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 글들을 읽고 나오면 마음 한편이 아린 건 어쩔 수 없다. 부모님과 나는 이런 사랑스러운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 받아들이자.


친한 동네언니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그 이상) 친정을 왕래하며 미주알고주알 엄마랑 수다도 떨고 반찬도 받아오는 언니다. 그날은 친한 동생이라며 내 얘기를 나눈 모양이다. 갑자기 전화를 걸어 인사고 머고 없이 대뜸 "너 고구마줄기 먹고 싶다고 그랬지? (그랬다고 대답하면 혼날 기세) 들깨, 뿌린 거 좋아해 안 뿌린 거 좋아해?"라고 물었다. "안 뿌린 거" "알았어" 뚝, 끊는다. 화난 거 아니다. 

그날 친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를 불러낸 그 언니가 건네준 건

언니의 친정어머니가 한줄기 한줄기 일일이 까서 반찬통 수북이 (사진은 이미 다 먹고 찍은) 담아주신 고구마줄기볶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왜 본인 딸도 아닌 나를 주시려고 일부러 사서 취향까지 물어가며 한솥 가득 볶으신 건지. 물론 우리 엄마가 내게 반찬을 한 번도 안 해주셨던 건 아니다. 특히 아빠는 최근 들어 자꾸만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카레를 만들어 갖다 주셨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감동받지 않으려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딸과 친한 동네 엄마일 뿐이고 남의 자식(?) 일뿐이다. 그런 내가 이혼하신 친정부모님으로부터 조력을 받지 못하고 김치든 무엇이든 사 먹거나 아니면 직접 해야 하는데 잘할 줄 몰라 못 먹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프셨다는 거다.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신파(?)에 흔들리지 않으려던 내 마음은 덜거덕, 오류가 났다. 미처 경계하지 못하고 방심해 버렸다. 손이 작은 나와는 다르게 양도 푸짐한 고구마줄기를 받아오자마자 입으로 욱여넣다. 야들야들 고소하고 짭조름한 그것이 먹먹한 가슴을 가득 채웠다.


아빠가 최근 자꾸만 반찬을 갖다 주시며 친한 척을 하시는 게 싫었다. 게다가 아빠가 일하는 곳에서 받은 것이라며 라면 번들을 자꾸만 주시는 게 무시되는 마음까지 들었었다. 라면 그거 머 좋은 거라고 그걸 갖다 주며, 게다가 가끔은 유통기한 임박한 것들이 많아서 기분이 별로였고, 우리가 사 먹으면 되는데 뭘 그걸 주러 일부러 차까지 타고 와서 갖다 주는지.


한데 이런 내 마음을 읽은 건지

라면도 갖고 오지 말라 그러고 줘도 시큰둥한 나에게 며칠 전 아빠 물으셨다.

"넌 뭐 좋아하냐? 먹는 거"

"음.. 뭐 다 좋아하는데"

"그래도"

"카페 브런치 같은 거 좋아해"

"먼 치?"

"브런치라고, 샌드위치나 빵요리, 파스타, 샐러드 이런 거야"

"그래 알았다"


그리고 1월 내 생일에 아빠와 식사하지 못했는데 그것 때문에 집에 오신다고 해서 맘속으로 툴툴거리는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OOOO 카페인데, 여기서 먹고싶은 거 골라봐"

"아.. 그럼 라구소스 리가토니"

"라, 뭐? 아니 여기 직원한테 말해라"

"아, 네 라구소스 리가토니요"


라구소스 리가토니가 뭔지도 모르면서.

머리는 점점 벗겨지고 그날따라 흙먼지 같은 게 묻은 허름한 잠바를 입고

한 손엔 깍두기와 양배추 피클 통을,

다른 한 손엔 아빠가 읽지도 못하는,

22000원이나 줬는데 달랑 한 접시 줘서 아빠를 서운하게 한,

라구소스 리가토니들려있었다.


최근에 가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 가본 브런치 카페였다. 내가 말한 적도 없는데 아빠는 어떻게 알고 그곳을 간 거지. 나는 감동받아 울지도 않고 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으며 "오 맛있네" 를 연발하며 아빠가 보는 앞에서 리가토니를 푹푹 찍어먹었다. 아빠가 나를 지켜보지 않고 어서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우적우적 열심히 빨리 먹었다. 드디어 다 먹어가자 아빠는 일어나셨고 나는 서둘러 아빠에게 줄 것들을 챙기고 배웅을 해드렸다.


현관문을 닫고 돌아봤다. 테이블엔 4개의 리가토니가 남아있었다. 그제야 나는 천천히 음미했다. 눅진하게 소스가 배어있었고 진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무슨 맛인지 모르고 서둘러 먹은 것이 후회됐다. 조금 천천히 먹을걸. 3개에서 2개로 줄어드는 리가토니를 보며 방어벽을 치고 얼음성 안에 갇혔던 내 심장이 조금은 말랑해지는 걸 느꼈다. 마지막 남은 1개. 옆구리가 터졌고 이미 식어 이전의 것들보다 볼품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맛볼 수 있는 유일한 리가토니였다. 나는 여전히 울지도 않고 요동도 않으며 마지막 리가토니를 꾸욱 찍어 먹었다. 열어 논 창문으로 미세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리가토니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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