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역할

주당의 세계

H는 술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성적인 H는 술을 먹으면 말이 많아지며 외향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곤 한다.

그러기에 사회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상사의 술 시중에 잘 맞춰 줄 수 있는 음주량을  가졌기에 사회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의 아내는 H가 주장하는 술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확고한 믿음에 세뇌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내는 그가 맹신하는 술이 사회생활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주변의 A씨도 B씨도 술을 못 먹지만 사회생활을 너무 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가정에서도 자상한 모습의 남편들이었다.

그때부터 H의 아내는 술이 사회생활을 잘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H가 필요에 의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마시는 것이라 확신했다.

어느 날 H의 가족들이 모두 당일치기 피크닉을 가게 되었다.

H는 계곡 옆 에어컨 달린 황토방을 어렵게 잡았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더위에 고생 안 해도 된다는 말을 힘주어 덧붙였다. 하지만 H의 아내와 재수 씨는 알고 있었다.

계곡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는 먹을 음식을 다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고 황토방이란 말은 시간이 난다면 잠시 쉴 수도 있는 곳이라는 뜻인 것을 말이다.

계곡과 온돌방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H의 아내와 재수 씨는 각자 나눠서 음식 거리를 장 봐서 전날 늦게 까지 다듬고 준비했다.

그리고 당일 아침 일찍 가스버너, 전기 그릴부터 온갖 주방용품을 챙겨 피크닉 장소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아내와 재수 씨는 준비해 온 부추를 이용해 부추전을 굽고 H와 그의 남동생은 그 부추전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계곡에서  물놀이를 한 후 이번에는 점심 메뉴로 준비된 삼겹살이 구워지기 시작했다.

황토방 옆 평상은 이내 음식 접시와 빈 술병으로 가득 채워졌다. H의 아내와 재수 씨는 여백의 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채워지는 접시와 술병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마지막 술을 털어 마신 H가 취해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황토방으로 들어가 자기 시작했다. 

H의 아내는 한 때 술을 마시고 자버리는 것이 H의 고도화된 뒷정리 회피 전략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술이 좋아 마시다 취해서 잠이 오면 자버리는 것이 이었다.

H의 남동생 역시 취기가 올라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단지 오늘도 역시였다 뿐이다.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설거지까지 모두 H의 아내와 재수 씨가 하게 되었고 피곤했던 재수 씨는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운전대를 잡았다.

아내는 분명 잠에서 깬 H가 뻔뻔하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깨우지!"

하지만 반백살이 다 되어가는 H도 이제 눈치를 보는 건지 미안한 듯 주섬주섬 남은 쓰레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냥 봐줘야 하나?"

암만 생각해도 H의 아내는 심성이 참 곱다.

정리되지 않을 것 같은 평상 위 많은 쓰레기들이 우여곡절 끝에 다 치워졌고

H의 아내는 황토방 에어컨 밑에서 10분만 누워 있고 싶어 졌다. 하지만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십 분을 채우지 못한 채 운전대를 잡았다.

H의 아내와 재수 씨는

이 피크닉이 두 여자의 품앗이로 시작되어 끝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조금의 희망을 가져 봤던 것이다.

H의 말처럼 사회생활에서 술은 긍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 아직도 술을 먹어야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고리타분 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니 정글 같은 직장에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술과 친해져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술은 가정의 평화에 한해서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