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우와 그렇게 잠수 이별을 하였다.
자유로웠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즐거웠다.
나는 정우를 사귀면서 하지 못했던 일, 하지만 하고 싶었던 일 하나를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탱고
커플 댄스라 애인이 있다면 결사 반대할 탱고를 배워 보기 위해 탱고 동호회에 가입했다.
동호회에서 운영하는 기수 수업에 등록한 후 아르헨티나 정통 탱고의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몇 달간의 기수 수업 후 파트너와 졸업 공연도 했다. 그 후 전국 유명 탱고바를 찾아다니며 탱고를 추며 즐거움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탱고를 추며 전혀 외로울 틈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보기만 해도 짜릿한 탱고를 내가 직접 추게 되다니 설렘을 넘어 심장이 쿵쾅 거릴 정도였다.
탱고는 아르헨티나 부두가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춤이다. 나는 탱고를 통해 애환이 아닌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연애든 결혼이든 구속과 절제가 일정 비중, 어쩌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오랜 연애 끝 맞는 해방감에 젖어 탱고 선율에 젖어 화려한 듯 절제된 춤사위에 홀린 듯 빠져 들었다.
서울에 유명한 탱고바에도 갔다. 지방민들은 볼 수 없는 연예인 급 낯짝을 가진 남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자들 사이에 둘러 쌓여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남자를 발견했다.
얼굴에서 빛이 나던 그 남자를 본 순간
내가 비싼 차비를 들여 서울까지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공연이 아닌 자유롭게 탱고를 즐기는 파티를 밀롱가라고 한다. 탱고를 추는 클럽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밀롱가에서는 보통 남자가 여자에게 춤 신청을 하고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춤신청 후 기본 3곡의 음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원칙이다. 2곡만 추고 가버리는 건 아주 무례한 일이다. 파트너와 호흡이 잘 맞다면 3곡이 끝나고 1곡 정도는 더 출 수도 있다.
나는 그때도 직진녀였다.
나는 용기 있는 여자가 미남과 춤 출수 있다는 생각에 먼저 다가가 춤 신청을 했다.
그리고 콩닥거리는 내 심장처럼 스텝도 몸도 떨렸지만 세곡의 탱고를 함께 췄다.
딱 3곡이 끝나자 남자는 인사를 하고 다시 여자들 틈으로 사라졌다. 딱 3곡이었다.
그렇게 그는 떠났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 남자의 광채 나는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아마 나 같은 여자가 차은우를 실물로 본다면 기절 정도는 가뿟하지 않을까 싶다.
일생일대의 아쉬운 탱고 3곡이었다.
(결론적으로 춤바람은 무섭다.)
그 사이 나는 총 세명의 남자를 만났다.
첫 번째 남자는 엄마가 동네 총각이라며 소개해 준 남자였다.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던 그 남자는 집도 부자였다. 엄마는 그 남자와 내가 잘 되길 빌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자의 얼굴이 못생겨서였다.
그렇게 철이 없었다. 얼굴은 살다 보면 그저 평준화되어 예쁜지 아닌지도 관심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굴러 들어온 복을 차 버린 걸 수도 있다.
두 번째 남자는 대전 사람이었다. 지방에 일 때문에 내려왔다 소개팅으로 나와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간질간질 윗 지방 말투가 도대체 적응이 안 되었고 결론적으로 또 외모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서울 말을 쓰는 남자를 좋아한다. 밑 지방의 사투리를 평생 듣고 살다 보면 서울말을 쓰는 남자에 대한 환상 같은 걸 갖게 되었다. 자상하고 친절할 것 같은 그런 무지에서 나오는 환상 말이다.
하지만 간지러운 말투가 외모의 벽을 뛰어 넘기는 힘들었다.
세 번째 남자는 공무원이었다. 근데 음흉하기가 하늘을 찔렀다. 나 같은 보수적인 여자 앞에서 자꾸 신체검사를 운운하며 변태 같은 소리를 해 대어 난 그 남자를 몇 번 만나다 인연을 끊어 버렸다.
탱고 클럽과 보수가 사뭇 모순처럼 들리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술로 탱고를 췄을 뿐 나이트클럽, 부비부비, 부킹 등등 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일 년 가까이 열심히 추던 탱고도 어느새 시들시들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번째 남자와 그렇게 인연이 끝난 후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정우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빠 어쩐 일이세요?"
"뭐 하고 사노?"
"그냥 놀다 들어가는 길이에요."
"가스나 ~~ 아직 안 들어가고 뭐 하노?"
변함없이 친근하게 가스나를 날려주는 정우의 절친이었다.
그렇게 정우의 절친인 오빠와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가던 중이었다.
오빠는 내게 슬며시 정우 이야기를 꺼냈다.
"니 정우 어떻게 사는지 안 궁금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