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고시원에서 계절이 세 번 바뀔 무렵 나는 시험을 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관운이 없어 결혼도 일찍 못하고 시험운도 없을 것이라는 철학관 말이 또 생각났다.
점괘가 발목을 잡듯 어차피 합격을 못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공부하기 싫은 핑계도 가지가지였다.
다시 취업을 해야 할 것 같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 사이 들려온 정우의 결혼 소식에 놀람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 천하에 쿨하지 못한 여자가 되어 부끄러웠다. 솔직히 힘들었다.
'그 집 어머니가 얼마나 별난데 누군지 모르겠지만 개고생은 따놓은 당상이네'
하며 쓸데없이 정우의 아내 걱정을 하기도 했다.
진심 어린 걱정이 아닌 잘 사나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못 먹는 감에 침 뱉듯 아쉬움을 달랬다.
정우와의 긴 인연은 정우의 결혼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나는 덩그러니 남았다. 정우와 함께한 지난 시간은 생각할수록 아프기만 했다. 연애의 아름다운 결말이 결혼이라면 새드엔딩이 따로 없는 이별이었다.
친구들이 청첩장을 돌리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지금으로 치면 아주 일찍 결혼을 했다. 무탈하게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다.
진주의 결혼식 날이었다.
나는 혼자라 편하다는 이유로 진주의 들러리를 맡아 신부를 밀착 보조 하고 있었다. 진주 부부는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비행기 시간 때문에 반나절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양쪽 친구들을 모아놓고 맥주 집에서 간단한 피로연이 열렸다.
결혼 적령기의 선남선녀가 모였으니 솔로인 친구들을 연결시켜 주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그 솔로 중 한 명이 나였고 또 다른 한 명이 상진이었다.
사랑은 변해도 취향은 변하지 않는다.
상남자 스타일의 상진이는 어떤 면에서 정우와도 닮아있었다. 그렇게 상진과 일 년 정도 만남을 가졌다. 나이가 있었던 터라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결혼이 두려웠다. 결혼이란 것이 둘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였다.
또 누군가가 내 결혼을 방해할까 봐 나는 도망가고 싶어졌다. 상진은 자세한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혼을 계속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결혼은 내게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혼자 살 수 있을까? 끝없이 고민하던 그때의 결론은 "No"였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대부분이 결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결혼을 안 하는 이유를 추궁당하는 세상이었다.
혼자 살 자신도 노처녀로 비혼의 이유를 추궁당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또 상견례 날이 잡혔다.
그리고 상견례는 내 걱정과 다르게 무탈하게 지나갔고 결혼 날짜도 이내 잡혔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꿈꾸던 결혼식과 웨딩드레스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결혼을 무사히 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정말 대충 결혼식을 준비했다. 상진은 여느 여자들처럼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나를 퍽 마음에 들어 했다. 고르고 재는 일도 없었다. 그런 까탈을 부리며 골라봤자 결혼이 깨지면 다 의미 없어지는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신혼여행을 예약할 시기가 다가왔다.
나는 이렇게 준비하다 결혼이 파투라도 나면 비싼 신혼여행 비용을 날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쌓여 신혼여행 예약을 차일피일 미뤘다.
상진은 느긋한 것이 내 성격이라 생각해서 그냥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결혼식이 임박해 신혼여행을 예약했다.
그것도 남는 패키지 남는 나라로 말이다.
결혼식 당일
엄마는 내게 신신 당부했다.
"결혼식 할 때 신부가 울면 못 산단다. 절대 울지 마."
결혼식에서 펑펑 울어도 다들 잘만 살더라만은
나는 안 우는 연습을 몇 날 며칠간 했다.
그간 엄마 속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보다 더 힘들었을 엄마를 위해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몇 가지 다짐을 했다.
엄마 얼굴 안 쳐다보기
아빠 얼굴 안 쳐다보기
생각 없이 결혼식에 임하기
등 다양한 다짐을 주문 걸듯 내게 걸었다.
많은 하객들이 미어터질 듯 예식장을 채웠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듯 결혼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