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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살이v Dec 04. 2022

[하얼빈]

김훈 장편소설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 주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청춘의 언어였다. 이 청년들의 청춘은 그다음 단계에서의 완성을 도모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에너지로 폭발했다.

..(중략)..세 단어는 다른 많은 말들을 흔들어 깨워서 시대의 악과 맞서는 힘의 대열을 이루었다. 깨어난 말들은 관념과 추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날것의 힘으로 일어서서 말들끼리 끌고 당기며 흘러가는 장관을 보여주었는데, 저 남루한 세 단어가 그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 김훈 [하얼빈] 303쪽~ 304쪽, '작가의 말' 중에서



 평소 소설을 그다지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존경하는 작가를 꼽으라면 맨 먼저 생각나는 분이 '김훈' 작가이다. 그의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문장의 흐름은 필력에 힘을 실어주는 동시에 장면에 몰입하게 하는 마법과 같은 매력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칼의 노래' 이후 완전한 팬이 되었다. 이후 신작 '하얼빈'이 나왔다는 소식에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관련된 소재를 다룬 만큼 서사 내내 다소 무거운 무게감이 흐르면서도, 이를 정제된 글솜씨로 잘 풀어내었다. 역시 명불허전이다. 


 책 내용은 단지 저격 순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이토와 안중근의 서로 다른 시점에서 동시에 각각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조선말의 역동적인 시대를 조명한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조선통감부의 수장 이토 히로부미가 당시 구한 말 조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며 풀어낸 스토리였다. 물론 사실을 기반한 작가의 상상력이 대부분인 허구지만, 당시 시대상을 충분히 반영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추었다. 조선말 일본제국이 고종과 순종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몰락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을까 잠시나마 감정을 이입해서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안중근 역시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라고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31세 거사를 치를 당시 그 역시 한 여자 (김아려)의 남편이었으며,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그의 개인적인 가정사에 얽힌 심정 및 평소 사람 됨됨이에 관해 어찌 짐작이라도 하겠느냐만은, 아이를 키우는 같은 30대 남자로서 그런 힘든 결정을 하기가 그 역시 쉽지 않았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다른 많은 순국선열들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거사 후 일본제국은 끊임없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 장면을 무지렁이 폭도의 무지에서 비롯된 단순 만행이라고 폄훼하느라 주력했다고 한다. 재판 후 7일 내에 연달아 열리며 사형이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안중근은 내내 의거의 목적이 뚜렷하며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 이토를 죽였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자, 일본 측은 당황하며 재판 과정의 공개를 제지한다. 


'나는 헛된 일을 좋아해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세계에 발표하려는 수단으로 이토를 죽였다. ....이제 그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질문이 답변을 누르지 못했다. 질문과 답변이 부딪쳐서 부서졌고, 사건의 내용을 일정한 방향으로 엮어나가지 못했다. 답변이 질문 위에 올라탈 기세였다. 진술은 유불리를 떠나 있었다.

 - 본문 234쪽


 이 책에 관한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가 보다. 마침 '영웅'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12월에 개봉한다고 한다. 이 책은 단순히 하얼빈에서의 거사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거사 전부터 시작되어 시대상을 잘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내면 심리 묘사 및 취조 과정에서의 의 담담하고도 묵직한 태도를 잘 나타냈기에, 독자로 하여금 끝까지 긴장감을 갖고 스토리에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를 다룬 '영웅'이라는 영화 역시 이런 인물 내면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면, 비교적 단순한 서사 구조를 가지는 할리우드 영화를 뛰어넘는 훌륭한 천만관객 한국영화가 되지 않을까


 책 '하얼빈'을 통해 김훈 작가의 엄청난 필력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감동을 스크린에서도 볼 수 있길 간절히 고대한다. 한편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이 해방 후에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점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으로 평소 이렇게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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