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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살이v Dec 15. 2022

눈길에 눈길이 가는 날

선택과 후회

 올해 들어 눈다운 눈은 처음인 듯하다. 


 추운 겨울에 창문 너머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보고 있노라면, 비 오는 날과는 또 다른 이색적인 감수성이 살아난다. 어린 시절 창 밖 기와집에 쌓인 눈 덮인 지붕이 아직도 생생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내리는 눈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과 함께 알 수 없는 설렘도 같이 다가온다. 


 나는 '눈길[눈낄]'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발음하기도 쉬울뿐더러 동음이의어 모두 설렘을 포함한다. '눈 (eye, 시선)이 가는 길'라는 의미로 관심을 나타내기에 그 단어 자체에도 애착이 가면서, 또 다른 의미의 하얗고 소복한 '눈 (snow)이 쌓인 가지 않은 길 (road)'이 떠올라 기분이 좋다. 문득 눈길을 보다 보면 먼저 간 사람의 자국이 보이기도 하고, 새로 쌓인 고운 눈길도 보인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이미 누군가가 지나가서 눈이 녹아 있는 길을 가는 게 안전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린아이처럼 누군가 가지 않은 새 눈을 밟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눈길을 보고 있노라면 선택을 강요받는 느낌이 든다. 오늘같이 많은 눈이 내리는 날은 그동안 내가 어떤 옳은 선택을 해왔는지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된다.


 인지심리학에서는 한 것과 하지 않은 것 들 중에 후회를 한다면  대부분 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후회가 더 크다고 한다. 한 것에 대한 후회는 '함'으로써 한 가지 얻어진 결과에 대한 뉘우침이라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수많은 가능성에 대한 후회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내가 하는 후회는 대부분 '했던 일'에 대한 후회인 것은 왜 그런 걸까? ;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하고 싶은 성향이 있다. 나도 모르겠다. 다만, 살면서 크게 하나 배운 게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한 길이라면 그만한 이유는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경제 논리로 굳이 따지자면 높은 수요가 결국 높은 가격이라는 숫자로 정해지는 것이고, 인생의 갈림길에서는 경쟁률이나 붐빔으로 설명된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는 '남들 하는 것처럼' 하기가 굉장히 힘들지만, 또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게 해야 좋은 경우도 많다. 오히려 지난 선택을 돌이켜보건대, 남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음으로써 얻은 시행착오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가지 않았던 길에 유독 끌리는 이유는 왜 그런 것일까. 남들과 차별화되는 선택을 하면서 나만의 존재성을 그런 선택의 순간에 유난히 즐기는 듯하다. 아니면 단순히 알수없는 까닭으로 새 눈이 덮인 눈길에 유독 눈길이 가는 그런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님이 '한국인 이야기'에서 한국말 발음 소리에 내재한 가치를 재발견해주셨다. 선생은 한국인 DNA에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의 유전자가 있다고 하셨다. 밑도 끝도 없이 꼬불꼬불 이어지던 그 이야기 속에 담긴 한국인과 우리말 안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해 내셔서 정말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귀천하셔서 더 이상 훌륭한 글과 '디지로그'와 같은 창의성을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에는 이어령 선생님이 살아생전 써놓으신 주옥같은 글들이라도 다시금 읽어 보아야겠다. 


마지막으로 고은 시인의 '눈길'을 첨부한다. 나름 치열했던 입시를 지나고 나니 그 많던 수학 공식들과 영단어들은 온데간데없고 생각나는 것들은 당시 그렇게 읽기 싫어하던 '시' 들만 남아있다. 수학능력 시험에서 건질 건 시 밖에 없나 보다.ㅎ 우리 교육 과정에서는 어렵겠지만, 다른 모든 수험생들도 우연히라도 좀 더 다양한 시를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온 국민이 시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임인년 유난히 시끄러웠던 올 한 해가 마지막에는 조용히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 길 

                       고 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들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출처 <현대문학>(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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