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와이 한 달 살기 - 4일 차
날씨도 더운데, 운도 없는 날이었다.
버스를 두 번이나 놓쳤고, 결국 30분을 걸어 진주만 국립 기념관 앞에서 A express Bus라는 낯선 버스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낯선 버스를 타니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도로 한복판에서 차선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장난감 기차가 도미노를 쌓듯이, 커다란 트럭이 연석을 옮겨 단숨에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변신시켰다.
몇 분 만에 차선이 바뀌다니?!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에 맞춰 통행량이 많은 방향으로 도로를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잇따른 새로운 광경!
휠체어를 탄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경사로가 부드럽게 내려왔다.
버스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자리 좀 양보해 주세요.”
그리고는 손쉽게 좌석을 접어 휠체어 공간을 만들었다.
7명의 자리를 비워 2명의 교통 약자의 자리를 만들었다.
버스와 휠체어가 단단히 고정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분.
더 놀라운 건 그 과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아무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도,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도,
그저 자연스럽게 이 모든 과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일하게 감탄하며 두 눈을 반쪽이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버스는 최약자들을 위한 교통수단이라는 사실을.
자가용을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
운전을 하기 어려운 사람들,
그들에게 버스는 단순한 대중교통이 아니라, 자유의 도구였다.
한국에서라면? 그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출근길 버스 정류장의 높은 턱 앞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주변 사람들은 그를 도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눈치를 주고받았겠지...
그리고 만약 버스기사가 내려 휠체어를 탄 손님을 돕는 그 순간, 정적이 흐르며 빨리 출발하길 간절히 바라며 본인들의 목적지에 늦지는 앉을까 안절부절못하겠지…
하지만 여기에선 그런 일말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한국에 돌아왔을 때, 우리나라 버스에도 ‘휠체어 지정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버스 창틀에 작은 문구가 붙어 있다.
‘휠체어 승객 탑승 시 일어나 의자를 접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장면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하와이에서는 단 4일 만에 두 번이나 보았던 장면을, 한국에서는 수십 년을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자리가 있는 것과, 실제로 그 자리가 활용되는 것.
제도가 있는 것과, 그 제도가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것.
이 둘 사이의 차이.
하와이에서는 보행기를 가지고 타는 것에, 자전거를 가지고 타는 것에, 휠체어를 가지고 타는 것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올라타기 자체가 쉽고 빠른 버스.
버스는 이동 수단인 동시에, 그 사회가 얼마나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축소판이었다.
그 버스가 한참을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다들 내려요!”
버스 운전기사가 외쳤다.
순간, 사고라도 난 줄 알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다들 태연하게 버스에서 내리는 게 아닌가?
내 흔들리는 동공이 티가 났는지
버스 운전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휴식 시간이에요. 15분 후에 다시 출발합니다.”
뭐?
단체 여행도 아니고, 버스가 중간에 쉬어 간다고?
승객들에게 커피도 사 오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마트도 다녀오라고?
이건 또 무슨 여유로운 문화지?
버스 운전기사는 맥도날드로 향했다.
모든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내게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맥모닝은 이렇게 먹어야 제맛이야.”
그리고는 능숙하게 해쉬브라운을 소시지 맥머핀 사이에 끼워 넣었다.
“담백한 빵, 짭조름한 패티, 그리고 바삭한 해쉬브라운. 완벽한 조합이지.”
나는 얼떨결에 웃고 말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음엔 나도 저렇게 먹어봐야지!
“꼴깍”
그러고 보니, 아침도 못 먹고 버스를 두 번이나 놓치고 30분을 뛰어서인지
꼴깍하고 침이 넘어가고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점심으로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들고 버스 기사 옆에 앉았다.
‘밥과 초리조, 시금치, 계란 볶음.’
그와 나란히 앉아 한입, 또 한입.
그렇게 버스정류장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머리에 가지런히 예쁜 꽃을 꽂은 백인 할머니.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내 눈알 색이 예쁘다며 웃어 보이는 흑인 아저씨.
각자의 이야기와 개성이 가득한 이 작은 공간 속에서,
나는 버스라는 공간이 단순한 이동 수단 그 이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망설임 없이 오를 수 있는 곳.
운전기사가 승객들과 함께 휴식을 나누는 곳.
머리에 꽃을 꽂고, 낯선 이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
버스는 최약자들을 위한 교통수단이었지만,
어쩌면 가장 평등한 공간이기도 했다.
버스 한 대에서, 나는 참 많은 걸 배웠다.
자유와 배려, 그리고 여유.
그리고 맥모닝에 해쉬브라운을 끼워 먹는 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