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아일랜드와 벤치

#5. 하와이 한 달 살기 - 5일 차

by 솔트앤선

매직아일랜드를 걷다 보면 세상이 한없이 평화롭게 느껴진다.

유유히 헤엄치는 거북이, 뛰어노는 아이들, 여유롭게 요가하는 사람, 낚싯대를 드리운 채 바다를 응시하는 사람, 그리고 곳곳에 자리 잡은 벤치들.

햇볕이 잘 드는 곳, 나무 그늘 아래,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한 자리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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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앉아 10분, 20분, 30분… 1시간.

시간이 멈춘 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풍경만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문득 등 뒤, 벤치에 새겨진 작은 문구를 읽게 되었다.


“This was her favorite spot. May it be yours too.”

(이곳은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자리입니다. 당신에게도 그런 곳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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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깨달았다.

이 벤치는 누군가의 기억과 사랑이 담긴 자리라는 걸.


미국에는 ‘기념 벤치(Memorial Bench)' 기부 문화가 있다.

사람들이 살아생전 사랑했던 장소—공원, 해변, 산책로, 대학 캠퍼스, 도심 광장 등—에 벤치를 기부하고, 그 위에 고인의 이름과 짧은 메시지를 새긴 명판을 부착하는 것.


내가 좋아했던 곳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사랑했던 장소에 편히 앉아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의자에 앉는 사람들이 한 번씩 알지 못하는 고인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어떤 무언가와 연결되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가.


이 날 이후 나는 어떤 벤치에 앉더라도 명판이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이 짧은 문구들을 모으는 취미도 생겼다.


“Sit, rest, and think of me.”

(앉아서 쉬며 나를 떠올려 주세요.)


“He loved this view… and a good cup of coffee.”

(그는 이 풍경을 사랑했어요… 그리고 좋은 커피 한 잔도요.)


“Live simply. Love deeply. Laugh often.”

(단순하게 살고, 깊이 사랑하고, 자주 웃으세요.)


이 문구들은 마치 작은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사랑했던 사람이, 혹은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벤치에 새겨진 문장들을 하나하나 읽다 보니,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어떤 장소를 가장 사랑할까?

내가 가장 평온함을 느끼는 곳은 어디일까?

언젠가 나를 기억하는 벤치가 하나 놓인다면, 그곳엔 어떤 문구가 새겨질까?


벤치의 메모들을 수집하며 벤치를 기부하는 사람들 각각의 사연을 상상해 보았다.


어떤 벤치는 연인의 추억이 담긴 자리였다.

”For John and Sarah, who shared a thousand sunsets here.”

(이곳에서 천 번의 노을을 함께한 존과 사라를 위해)


어떤 벤치는 누군가의 꿈이 담긴 자리였다.

“He sat here every morning, dreaming of the impossible.”

(그는 매일 아침 이곳에 앉아,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나의 벤치에 앉은 낯선 이가 내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언젠가 한국에도 이런 문화가 자리 잡으면 좋겠다.

한강공원에도, 남산에도, 바닷가에도, 사람들이 사랑했던 장소에 기념 벤치가 놓이고,

그 자리에서 낯선 누군가가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느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앉아 쉬어 갈 수 있다면, 그곳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을 공유하고, 우리의 인생을 잠시 돌아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장소는 어디일까?

그리고 나는 어떤 문장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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