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꼬의 선물

#6. 하와이 한 달 살기 - 6일 차

by 솔트앤선

기억을 선물하는 법

하와이 어학원에서의 첫 주가 지나갔다.

이곳은 매주 월요일마다 새로운 수업이 시작되고,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이면 일주일간 배운 내용을 테스트하고, 에세이를 쓰고, 졸업식을 치른다.

누군가는 단 1주일을 머물고 떠나고, 누군가는 한 달, 세 달, 1년씩을 보낸 뒤 떠나간다.

머문 시간의 길이는 다르지만, 모두 같은 금요일에 이별한다.


오늘은 내 하와이에서의 첫 주를 함께 보낸 마리꼬가 졸업하는 날이다.

단 5일을 함께 했지만, 마리꼬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가 건네던 미소에 담긴 따스함은 교실 구석구석에 번져 있었고,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미소 짓는 모습은 마치 봄 햇살처럼 사람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녀가 한 달간 하와이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 친구 라이언을 잘 챙겨달라는 부탁과 함께 작은 선물 꾸러미를 내게 건넸다. 포장을 풀어보니 일본 캐릭터가 그려진 플라스틱 컵과 동전 지갑등이 들어 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그 안에는 마음 한 조각이 곱게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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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2011년, 나는 남미를 여행하던 중 히로시와 사오리 일본인 의사 부부를 만났다.

우리 셋은 하루를 온전히 함께 보냈다.

낯선 도시, 낯선 길을 함께 걷고, 이상하게 맛있던 길거리 음식을 함께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하루가 저물 무렵, 그들은 내게 작은 선물을 내밀었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그리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게 해주어 고마워요.”


장기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 짐은 최대한 가벼울수록 좋다고들 말하지만, 그들은 정반대로 누군가를 위해 작은 선물 몇 점을 챙겨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다녔다.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풍경을 지나쳤지만, 나는 여전히 히로시와 사오리 부부의 이름을 선명히 기억한다. 아마도 그들이 건네준 작은 선물 속에 담긴 감사와 인연이라는 정서가 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는‘오미야게(お土産)’라는 문화가 있다.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 여행을 함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풍경과 온기, 여행의 경험을 나누려는 작은 선물이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은 여행 중에도 오미야게를 나누곤 한다. 이를테면, 길을 알려준 현지인에게 작은 일본 과자 하나를 건네고, 함께 여행한 외국인 친구들에게 작은 기념품을 건네며 당신과 보낸 시간이 좋았다는 마음을 전하는 식이다.


감사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도 전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나는 그들 덕에 작은 선물 하나가 만들어내는 기억의 힘을 너무나도 잘 알게되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선물을 준비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2012년, 미국으로 인턴 교사를 떠나기 전 미국 문화 수업이 2주간 진행되었다.

팁 문화, 파티, 에티켓, 식기 사용 순서, 문 잡아주기, 호칭 사용법…

그리고 선물을 통한 감사의 표현.


어떤 선물을 준비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 좋을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하고, 인사동에 들러 전통 문양이 새겨진 책갈피와 젓가락, 전통 간식, 김, 자석 등을 구매해 홈스테이 호스트와 담당 선생님에게 줄 준비를 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살아간 듯 하다.

하와이에 와서 나는 내가 지불한 비용과 그에 걸맞은 서비스를 받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돈을 냈고, 그만큼의 서비스를 받는 것이 당연한 거잖아?”

홈스테이를 하면서, 어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호스트와 선생님에게 선물을 준비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히로시와 사오리 부부의 이름은 선명히 떠오른다. 시간이 흘러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름이 대부분 희미해져도, 마리꼬의 이름만큼은 십 년이 지나도 선명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 작은 선물이 가진 힘, 정확히는 그 속에 담긴 마음이 만들어내는 흔적은 단순히 작은 선물을 받은 것을 넘어서, 내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로 남았다는 느낌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결국 작은 선물 하나가, 한 사람의 존재를 강렬하게 각인한 셈이다.

누군가에게 기억이 된다는 건 물리적인 크기나 돈의 문제가 아니다. 고맙다는 마음을 섬세하고 따뜻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또다시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이번엔 내 가방 한구석에 '작은 한국'을 담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예쁜 전통 문양이 들어간 책갈피나 젓가락, 한국적인 키링, 작은 그립톡, 한국 전통 과자 몇 개, 접이식 부채 등. 꼭 부피가 크거나 품질이 뛰어난 고가의 물건일 필요는 없다. 아주 작은 물건들이라도 그저 내게 소중한 문화를 보여주고, 감사한 인연을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누군가에게는 십 년이 지나도 나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행의 절반은 풍경과 사건이지만, 다른 절반은 분명 사람으로 채워진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기억받으며 풍성해지는 것이다. 가방이 무거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나와 마주칠 수 많은 인연에 대한 작은 감사의 메시지를 준비해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을 정말 여행답게 만들어주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 조각 빛으로 남을 ‘기억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책갈피 하나, 작은 엽서 한 장일지라도, 건네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문득문득 떠올리며 웃을 수 있을 테니까.


세상에는 다양한 만남이 있고, 그 만남은 때로 빛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그 짧은 반짝임에도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있다. 짧지만 선명한 인연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히로시와 사오리 부부, 마리꼬를 통해 나는 배웠다. 내가 잠시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게도, 나라는 사람을 따뜻하게 기억할만한 작은 흔적을 남길수 있다는 것을.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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