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와이 한 달 살기 - 3일 차
바람이 달랐다. 햇살도, 공기도, 내 기분도.
어학원에 다니며 가장 좋았던 점은 영어 실력 향상도, 새로운 문화권의 친구를 사귀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
살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없는 질문들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멍해졌다.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며 보낼 때 기분이 좋은가?”
“나는 왜 영어를 배우고 싶은가?”
“한국에 외국인이 온다면 어디를 데려갈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첫날 레벨 테스트에서 받은 스피킹 테스트 질문들이었다.
나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영어 실력 때문만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화문 일대와 경복궁을 보여주겠다는 짤막한 대답.
그곳은 참 아름답다고, 한국의 역사가 담겨있다고, 형식적인 답변만 맴돌 뿐이었다.
인간이 특별한 이유를 묻자 머리가 새하얘졌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대한민국에서 살아오며 나는 ‘내 생각’을 정리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교과서에는 늘 정답이 있었고,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레벨 4를 배정받았다.
Lower intermediate CEFR 기준 B1+ 문법적으로 크게 틀리지 않고, 상담이나 인터뷰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
하지만 내 목표 레벨은 6, 토플 90점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연결어를 사용해 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Upper intermediate.
솔직히 자괴감이 밀려왔다.
10년 넘게 해외여행을 다니며 영어가 불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레벨 4 라니?
게다가 내가 배정받은 반의 구성은 일본인 다섯 명, 중국인 한 명, 한국인 한 명. 동양인 뿐이라니!
레벨 테스트 때 본 서양인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심지어 레벨 5반으로 배정받은 프랑스 친구보다 내가 영어를 더 잘하는데! 도대체 왜 내가 레벨 4에 있는 거지? 그 친구의 문법은 엉망진창이었다고! 돈 200만원 내고 이게 맞나?
자괴감과 복잡한 마음을 안고 오늘, 첫 수업에 들어왔다.
“세계의 주요 종교에는 무엇이 있나요?”
“전통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한가요?”
당연하지만 철학적인 질문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질문들이였다.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내가 부족했던 것 문법도, 단어 실력도 아니었다.
나만의 철학, 견해, 주장을 말하는 능력이 없었다.
이런 토론을 해본 적이 없으니, 질문을 받았을 때 할 말이 풍부하지 않았다.
해외여행을 할 때 필요한 영어들에 익숙했다.
호텔 체크인, 레스토랑 주문, 쇼핑, 길 묻기, 날씨, 유행하는 스타일, 일상적인 대화들,
늘 똑같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말하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내 견해를 설득력 있게 말하는 것.
그것이 중급영어의 핵심이었다.
내게 부족한 건 생각을 정리하는 능력이였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놀라운 점이 있었다.
13명이 함께 레벨 테스트를 봤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레벨 5~8에 배정되었고,
원어민 수준의 레벨 8 학생도 두 명이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조차 끊임없이 배우기 위해 어학원에 오다니!
나에겐 조금 충격적인 장면이였다.
내가 그들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하와이에 와서 돈과 시간을 들여 영어수업을 하며 시간을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영어를 잘한다고 멈춰있는 게 아니라,
시간과 돈이 생길 때마다 투자하며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는 것이었다.
하와이에 일주일만 머물면서도 어학원에 등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함께 영어 사용량을 늘리고,
어학원에서 주관하는 다양한 액티비티에 참여하며 이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들.
쿵쾅, 쿵쾅.
마음이 설렌다.
가슴이 하염없이 뛰었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것을 채울 방법도 알게 되었으니까.
어학원 수업의 일부로 매 시간마다 에세이를 써야 했다.
단순한 문법이나 회화 패턴 연습이 아니라,
나의 의견을 정리하고, 나만의 철학을 만들고, 그것을 영어로 표현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어떤 질문에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도록,
어떤 장소에서도 막힘 없이 말할 수 있도록.
처음엔 부담스러웠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었고,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글을 쓰는 시간이 쌓일수록 그 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하와이에 머루른 시간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바로 에세이를 쓰는 시간이었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나를 탐구하는 과정이었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들여다보고, 내면을 깊숙이 들춰보는 일.
무심코 흘려보냈던 내 속마음을 발견하는 시간.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가며, 나는 하와이에서 나를 알아갔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나는 에세이를 쓰며 그 답을 찾아갔다.
에세이를 쓴다는 건 결국 ‘나’라는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었다.
하와이 3일차, 많은 것을 배우며 느낀 날이다.
자극이 가득한 날.
쿵쾅, 쿵쾅.
이 설렘이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