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함흥 문화 여관 딸입니다.- 여든넷, 하경숙 어르신
기억은 가끔 색깔로 박제됩니다. 80년이란 세월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여든을 넘긴 하경숙 님의 기억은 선명한 '자줏빛'이었습니다. 여든을 넘긴 연세라 하셨지만, 저를 마주하는 눈빛만큼은 청년의 그것이었습니다. 첫눈에 참 명민하신 분이구나 느꼈던 직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나눌수록 80년 전의 시간을 어제 일처럼 길어 올리는 그 선명한 기억력에 저는 그저 놀랄 뿐이었습니다.
"우리 집이 함흥역전 문화여관이었어. 그 로까(복도) 마루가 말이야, 매일같이 닦아서 자주색 빛이 반짝반짝 났다니까."
80년 전의 번지수까지는 가물가물할지 몰라도, 함경남도 함흥시 함흥역전에 있었던 '문화여관'집 손녀였다는 사실을 말할 때만큼은 목소리에 힘이 실렸습니다. 어르신의 까랑까랑한 음성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오래전 함흥의 오후가 정지 화면처럼 펼쳐집니다.
역전에서 가장 현대적이었다는 백화점 같은 유리문, 그 문을 통과한 햇살이 거울처럼 닦인 자주색 마루 위에서 부서지던 풍경. 그 찬란했던 마루 위를 맨발로 뛰어다니던 소녀는 그때 알았을까요. 그 문이 닫히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당시 함흥은 함경남도의 심장부였습니다. 그 중심을 지키던 문화 여관은 그 시절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드나들던 명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보낸 유년의 조각들을 어르신은 하나하나 펼쳐 보였습니다. 여관 안팎을 분주히 오가던 손님들의 말소리, 주방에서 풍겨 나오던 정갈한 음식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부심이었던 그 거대한 유리문 너머로 보이던 세상.
“들어가는 입구가 지금 백화점 같이 유리문으로 돼가지고, 밀고 들어가고 밀고 나오고 그랬어요. 입구는 '도끼다시(인조석 물갈기)' 바닥이었는데, 어찌나 깨끗한지 '싱(신발장)' 앞에서 우리끼리 주저앉아 공기놀이하던 게 기억이 나요.”
반짝이는 마루복도 위로 쏟아지던 동남향의 햇살. 그것은 6.25 전쟁의 포화가 닥치기 전 찬란하고도 평화로운 일상의 증거였습니다.
문화여관집 손녀딸은 참 귀하게도 자랐습니다. 명절이면 가지 사이에 꿩고기를 '쫏아(다져)' 넣고 정성껏 쪄낸 함경도식 가지나물을 먹었고, 귀주떡(술떡)과 꿀에 뭉친 찰떡을 간식으로 먹으며 자랐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딸을 목마 태워 따뜻한 방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아이는 아버지의 넓은 어깨 위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까불며 놀았습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 반짝이지 못했습니다. 공부 잘하고 똑똑했던 아버지가 북한 정권의 요주의 인물이 되면서, 가족은 '피난'이라는 피할 수 없는 선택지에 놓입니다.
“네가 네 애를 데리러 올 때, 내가 내 딸을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겠느냐.”
외할머니는 혼자 북에 남아야 할 상황이 되자 다섯 살 외손녀를 볼모 아닌 볼모로 잡았습니다. 그렇게 어르신은 문화여관에 남았고, 부모님은 넉 달 된 동생만을 데리고 먼저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그 순간이 부모님과의 기나긴 이별의 시작일 줄은, 그리고 문화여관의 그 눈부셨던 유리문이 곧 산산조각 날 줄 아이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이 떠나고 홀로 남겨진 아이의 등 뒤로 찬란했던 햇살은 점점 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다섯 살 아이는 외할머니의 치마폭에 싸여 영문도 모른 채 유리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고, 문 밖에는 딸을 두고 떠나는 부모의 무거운 발걸음이 멀어져 갔습니다. 평화는 그렇게, 함흥역전 유리문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80년이 흐른 지금, 여든을 넘긴 소녀는 비로소 그날의 마루 복도를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자주색 빛이 반짝이는 마루가 있고, 아버지의 넓은 어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날 이후 다섯 살 아이가 전쟁을 통과하며 겪은 시간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이 글은 2024년 11월 15일 실향민 하경숙 어르신 인터뷰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하경숙 어르신은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