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장승포의 그날, 기록에 남지 않은 통곡
역사는 1950년 12월 25일,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당시 일곱 살 꼬마였던 하경숙의 기억에 남은 풍경은 전혀 다릅니다. 오늘 이야기는 공식 문서가 아닌, 한 아이의 영혼에 낙인처럼 찍힌 '기억의 풍경'입니다.
1950년 12월 23일. 함흥을 떠나 거제에 닿기까지 사흘의 항해. 그건 시간이라기보다 차라리 '견딤'의 결정체 였습니다. 물 한 모금 없이, 편하게 다리 뻗을 공간도 없이 서로의 거친 숨소리에 의지해 바다 위를 흘러온 3일. 장승포항의 해안선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환호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짐승 같은 본능으로 보따리를 꽉 쥐었을 뿐입니다.
며칠을 굶주림과 추위에 절여진 채 달려온 피난민들에게 장승포항의 불빛은 가느다란 구원줄 같았습니다. 하지만 안도감보다 앞선 것은 낯선 땅이 주는 서늘한 공포였습니다. 함흥의 따뜻한 구들장을 뒤로하고 도착한 남쪽의 끝자락. 일곱 살 경숙의 눈에 비친 거제는 기적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길의 막다른 골목처럼 보였습니다.
배가 멈춘 순간, 항구에는 안도의 숨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곱 살 아이의 기억 속 첫 장면은 ‘쿵’하는 굉음이었습니다.
배가 이제 멈췄는데 어떤 일이 있었냐면 뭐가 쿵 하고 소리 나더라고요. 배 중심을 잡는 5000톤짜리
무게에 철판이 내려앉은 거야. 우리는 그날 배에서 내려 밖에서 막 뛰어놀고 이랬는데 엄마 아버지는
짐이라도 들고 나오려 싸다가 죽었어. 깔려 죽었어.
경숙의 기억 속 그날은 배의 중심을 잡던 5,000톤 무게의 거대한 철판이 내려앉았고, 다친 사람들 비명이 항구를 가득 채웠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울며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녔습니다.
사람들이 들것에 들고 가면은 이렇게 보고 엄마, 엄마, 아빠, 엄마 누구야? 엄마 찾 는 데 엄마가
있어야지 죽어서 없는 거야. 애 들이 막 울고 엄마 없다고 엄마 죽었냐고 살았냐고 여기 가고 저기
뛰어댕기고 이러고 난리를 치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고아야. 엄마 아버지는 그 철판에 깔려서
몇 천명이 죽었대요.
항구에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남았습니다. 훗날 하경숙 어르신은 아이들 가운데 일부가 미군 부대 주변에서 구두를 닦으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슈샤인 보이’라고 불렀고, 그 시절의 풍경은 가수 현인의 노래로도 남았습니다.
무사히 남쪽에 도착한 가족 열여섯은 안도의 숨을 쉬기도 전에 생존이란 또다른 전쟁터에 던져졌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섬 거제. 다행히 맘씨 좋은 집 주인을 만나 작은 방 하나를 빌릴 수 있었습니다. 열 명이 넘은 가족들이 다닥다닥 붙어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함흥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외할머니는 거제도 시장 바닥에서 서슴없이 가마솥을 잡았습니다. 외할머니는 곧장 팥을 삶아 죽을 끓여 두 이모와 함께 팔았습니다. 어른들이 장사를 하는 동안, 일곱 살 경숙은 산에서 나무를 주워 왔습니다. 장사가 끝나고 남은 팥죽 찌꺼기를 긁어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만남이 찾아왔습니다. 시장에서 팥죽을 사러 온 한 남자의 목소리가 낯익어 보니, 죽은 줄 알았던 막내 이모부였습니다. 북한군에 끌려갔다 아군의 폭격 틈을 타 탈출해 거제까지 흘러 들어온 이모부와의 재회로 가족은 17명이 되었습니다.
거제도에서의 고단한 생활이 3개월째 접어들던 1951년 3월, 시장 바닥에 핸드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부산에 먼저 가 자리를 잡았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3월 달 쯤 됐는데 이모가 갑자기 집으로 들어오더니 짐을 다 챙겨야 된다고 그랬어요. 시장 바닥에서
핸드마이크로 우리 식구 이름을 다 부르더래요. 그래서 이모님이 죽퉁 두개 다 버리고 우리 이름
부르는 대로 찾아갔더니. 우리 어머니가 쌍둥인데 그 남자가 우리 쌍둥이 이모를 딱 보더니 당신 언니
가 지금 부산에서 살고 있는데 당신들 다 데리고 오라고 그랬다는 거에요.
17명의 가족은 자갈치 시장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고, 그곳에서 군복을 입고 검은 안경을 쓴 키 큰 남자가 경숙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몇 년전 남쪽으로 몸을 피하면서 얼굴조차 잊었던 아버지와의 눈물겨운 상봉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은 철판보다 무거운 비극을 견뎌온 일곱 살 소녀에게 비로소 허락된 전쟁의 마지막 안식처였습니다.
기록은 그날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에게 그날은 평생 잊히지 않는 울음으로 남았습니다.
이 글은 2024년 11월 15일 실향민 하경숙 어르신 인터뷰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하경숙 어르신은 현재 미국 애틀란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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