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금 Sep 26. 2015

9년 전 우리의 첫 데이트

같이 영화 보러 갈래?

 후추와 나는 1년 간 좋은 친구로 지내왔다.



 반년이 지난 쯤부터는 스타크래프트를 가르쳐 주겠다며 매일 네이트온에서 나에게 배틀넷 접속법부터 게임 운영 방법 정도를 알려주는 정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이성의 감정은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후추는 가끔씩은 좋아하는 언니에 대한 이야기도 나에게 묻곤 했다.


 "나 미원 누나가 너무 좋아서 기숙사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기숙사 들어가는 조건은 어떻게 돼?"

 "나 미원 누나한테 성년의 날에 꽃을 주고 싶은데, 자연스럽게 주려면 아무래도 옆 누나꺼 까지 챙기는 게 좋겠지?"


 나는 정말 1%의 사심도 없이 후추에게 모든 연애 코치를 해줬다.





 우리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나는 '당시 남자친구'에게 들려주려고 보낸 라디오 사연을 그 사람이 놓쳐 못듣게 되자, 후추에게 내 사연을 좀 녹음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해...)



 그래서 본의 아니게 전 남자친구에게 보낸 그 달달하고 절절한 연애편지를 후추에게 모두 보여주게됐다.



 그렇게 절절했던 전 연애가 끝나고 내가 헤어짐에 아파할 때 후추는 술자리에서 우는 내게 티슈를 뽑아 다른 친구들 몰래 건네는 정도로 마음을 표현했었다.




 후추와의 첫 데이트는 별 볼일 없었다.

 후추가 어느 가을 날, 돈을 주웠다며 꽁돈은 빨리 써버려야 한다고 "같이 영화보러 갈래?" 했고,

 그래서 나는 영화도 자기 돈으로 보여준다고 하고, 주운 돈이니 빨리 써버리는게 좋겠다고 생각해 영화를 보러 같이 가겠다고 했다.



로맨티스트 후추가 여전히 가지고 있는 9년 전 CGV 티켓


 당시 그렇게 흥행하지도 않았던 영화 '가을로'를 보고, 처음으로 단둘이 밥을 먹게 됐다. 커피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식당에 가서 스테이크와 베이비립을 시켰는데, 세상에나! 후추는 여자와 밥을 처음 먹는 순둥이인데다가, 스테이크도 베이비립도 처음본 순수 그 자체인 소년이었다.


 보통의 남자 고등학생은 여자친구가 없으면 양식을 먹을 일도 잘 없거니와 본적도 없다는 것을 몰랐던 내 탓이었다. 먹는 방법도 모르는 후추에게 나는 친절하게 베이비립을 먹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스테이크 써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그리고 밥을 맛있게 먹는데, 갑자기 후추가 툭 꺼낸 말이 "나 오늘 생일이야."  였다. 이게 무슨 소리????

 네 생일에 그냥 친구인 너와 내가 밥을 단둘이 먹는 이 상황은 너무 애매하고 이상하지 않냐는 표정을 짓자


 "아아, 근데 그렇게 부담 갖지는 마 우리집은 음력을 쇠니까 오늘이 내 생일은 아니야. 생일은 맞는데 생일을 오늘로 챙겨본 적은 없고, 그러니까 뭐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날은 아니야."


하하하하. 그때 느꼈던 그 당혹감을 100%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정말 큰 당황을 했었나보다.


 아무튼 그렇게 후추의 2006년 생일날 우리는 첫 데이트를 했다. 영화도 보고 스테이크도 썰었으니 데이트다운 데이트로!



 나는 후추보다는 조금 더 세련된 도시여성이었기 때문에 세련된 발걸음으로 '베이커리'에 들어가 조각케익을 두 조각 사서 생일 선물이라며 건넸다.


 후추는 조각케익도 처음 먹어봤다고 했다. 조각케익을 들고 신나있는 후추를 보고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후추와 있는 게 좋다고.







작가의 이전글 2007년, 연애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