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제주 여행에 특별한 일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라도는 더더욱 일정에 없었다. 우연히 오메기떡을 찾다가 모슬포항 근처로 가게 되었고(오메기떡보다 우연히 먹은 쑥 흑임자 찐빵이 더 맛있었다), 예전에 마라도에서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갑자기 마라도로 발길을 돌렸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았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예쁜 섬 풍경을 마라도에서 봤고, 수백 마리의 제비들이 떼로 다니는 장관도 처음 보았고, 한국의 최남단이라는 의미를 느끼며 머나먼 바다를 구경했던 좋은 기억이 있었다. 마침 와이프가 마라도를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고 하여 이번이 아니면 언제 가 보겠냐 싶어 배 시간을 10분 남겨 놓고 승선신고서를 작성하였다.
배를 타니 과자를 받아먹으려는 갈매기들이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우리는 바다를 더 잘 보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아이들이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고, 우리도 터키 여행 이후로 오랜만에 타 보는 배에 신이 나 있었다. 배가 출발하자 몇몇 갈매기들은 배를 따라왔고, 파도에 배가 흔들렸다. 중간쯤 가자 왼편으로 가파도가 보였고 그때부터 와이프는 울릉도에서도 하지 않은 배 멀미 때문에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배는 25분 만에 마라도에 도착했다. 마라도에 도착하니 처음 우리를 맞이한 냄새는 쥐포를 굽는 냄새였다. 할아버지 한 분이 입구에서 쥐포를 굽고 계셨고, 이어서 마라도에서 유명한 자장면집이 줄지어 있었다(쥐포 할아버지가 위너인 듯). 마라도에서 유명한 듯한 톳자장면을 먹어 볼까 하다가 너무 비싸고 육지와 맛에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서 우리는 식당들을 그냥 통과했는데, 코로나 시기를 지나서 그런지 빈 식당들이 많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쓰러져 가는 빈 건물들 때문에 마라도의 예쁜 풍경도 가려지는 것 같았다.
13년 전 나의 기억에 있던 마라도는 풍경이 아름다웠고 좀 더 컸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겨울이라 그런지 아름다움이 조금 덜했고, 생각보다 더 작았다. 그래도 와이프와 마라도 곳곳의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생각들을 나누며 산책을 했다. 끝없이 트인 바다를 보며 가슴이 시원해지기도 했지만, 거대한 자연과 큰 파도에 대비된 인간의 작은 삶이 덧없어지기도 했다. 더군다나 전날 고속도로에서 화물차 바퀴가 빠져서 반대편에서 달리던 고속버스로 돌진해 두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던 터라 인생이 더 허망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1시간 안에 마라도 한 바퀴를 돌고 마라도 선착장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여유를 즐겼다. 푸른색 바다와 황토색 억새들과 검은색 현무암 절벽들이 배경이 되어 주었다. 곧 우리가 탈 배가 들어왔고 배에 타자마자 25분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 제주 여행은 갑자기 계획 없이 가게 되었지만 기억에 많이 남았다. 식당이나 가야 할 곳을 정해 놓았을 때보다 더 알찼던 것 같고, 여유와 낭만이 여행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여행에 있어서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매일 힘들게 일하던 곳을 벗어났다는 해방감, 그리고 해야 할 일들과 촘촘한 계획들로부터 벗어났다는 여유가 중요하다. 부산으로 여행을 온 사람에게 부산은 부산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부산과 다르다. 마찬가지로 같은 제주도지만 제주도로 휴양을 온 사람이 느끼는 제주와 제주도가 일터인 사람이 느끼는 제주는 다를 것이다. 어찌 보면 ‘원효의 해골물’처럼 생각하기 나름일 수 있으나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생각을 바꾸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통해 환경을 바꾸고, 바뀐 환경에서 생각을 전환시키고, 전환된 생각으로 휴식을 취하고, 휴식을 하면서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