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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Sep 11. 2024

1. 벚꽃 대신 눈꽃이 내리던 3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다 


눈이 온다. 어둑해진 창밖 너머로 하얀 눈이 바람에 휘몰아친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몇 분마다 나오는 기내 안내방송은 착륙하지 못한 채 상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는 중 일테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보고 있자니 눈앞에 닥친 현실이 피부에 와닿는다. 


우리 가족은 캐나다에 왔다. 


1999년 3월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친구들은 새 학기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내 내 인생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에 심란했다. 따스한 봄바람조차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내 걱정을 더 키워만 갔다. “헬로, 하우 아 유. 아이 앰 어 걸, 유 알 어 보이" 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학교 공부를 따라가고 친구를 사귈 것인가.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벚꽃망울들이 내게 묻는 것만 같았다. “우리를 떠나 잘 살 수 있겠어? 거기는 그렇게 춥다며. 앞으로 우리를 못 볼 텐데 어떡해?” 



이민의 바람이 거세게 불던 90년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니 캐나다라는 나라가 자주 우리 가족의 입에 올랐다. 자녀교육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아빠는 일종의 “아메리칸드림"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가족을 떠나 편안한 한국 생활을 접고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이민을 반대했지만 결국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서 캐나다행에 손을 들었다. 



캐나다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눈과 어둠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낮에라도 도착했으면 좋았으련만. 예상시간보다 훨씬 늦게 착륙한 비행기와 그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던 수속 절차를 밟고 나서 공항 밖으로 나오니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혹은 그 보다  늦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둑한 밤을 뚫고 사방팔방에서 불어대는 칼바람은 내 볼에 남겨있던 한국의 마지막 봄 자취까지 앗아갔다. 아는 얼굴이라도 있었으면 덜 충격적이었을까. 긴 비행 끝에 우리를 두 팔 벌려 맞이해 주는 이는 없었다. 텅 빈 길거리에서 미리 예약해 둔 리무진 서비스 기사 아저씨가 하품을 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간까지 기다려준 게 어디냐며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엄마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낑낑대며 꽉 찬 4개의 이민가방을 실은 후 리무진은 어두운 미지 속으로 달렸다. 도착한 곳은 토론토 다운타운에 위치한 유스 호스텔이었다. 그때는 호스텔이나 호텔이나 한 끗 차이니까 비슷한 곳인 줄 알았다. 호텔을 호스텔이라고 잘못 쓴 줄 알았으니까. 키를 받고 아빠가 예약한 방에 들어가서야 호스텔의 참 뜻을 알게 되었다. 이불도 없는, 달랑 2층짜리 침대 두 개와 화장실이 있던 방. 젊은 배낭 여행객들이 하루 이틀,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 4인 가족이 아늑하게 지낼 곳은 절대 아니었다. 



그제야 엄마가 캠핑 침낭을 이민가방에 넣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캠핑 때만 쓰는 침낭을 낯선 곳에서 펼치니 잠시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만으로 호스텔의 냉기를 견디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에서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걸까. 엄마 아빠는 무슨 계획이 있는 걸까. 벚꽃 아닌 눈꽃이 매몰차게 내리는 창밖을 보며 우리 가족의 앞날을 걱정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 느낄 수 있었던 시끌벅적했던 동네 시장의 온기가 그리워졌다. 새벽 고요함을 뚫고 윙윙거리는 제설차의 눈 치우는 소리와 창문에 매섭게 부딪치는 바람소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잠 못 이룬 캐나다에서 첫 밤이 지나고 동이 트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엄마는 아침으로 한국에서 사 온 “오뚜기 3분 시리즈" 박스를 꺼냈다. 캠핑 침낭에 이어 캠핑하면서 먹었던 오뚜기 3분 카레를 보니 나와 동생은 신나기만 했다. 밖에 나오니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청설모가 얼마나 길거리를 누비며 다니던지. 자연의 나라에 왔다며 우리는 호들갑을 떨었고, 그걸 남기겠다고 열심히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중에 현상을 하고 흰 눈밭에 흐린 검은 점들을 보며 이 사진을 왜 찍었는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지만. 



반면 우리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겠지만 부모님의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스트레스와 불안감으로 뒤덮여갔다. 당시 유스 호스텔에 있는 공중전화를 붙들고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하며 울던 엄마가 떠오른다. 결국 주체할 수 없이 콸콸 흐르는 엄마의 눈물을 보며 우리가 이 시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아빠는 캐나다에 와서 알아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캐나다 도착 후 며칠이 지나도 어디로 정착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여기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자 부모님의 언성은 종종 높아졌다. 물론 아빠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했겠지만 인터넷도 활성화되어있지 않던 90년대, <캐나다 이민>이라는 책자를 가이드 삼아 4인 가족을 데리고 먼 타지로 온 아빠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는 안 되겠으니 어느 하루, 책자에 나온 정보를 가지고 4인가족이 호스텔 근처 역으로 총출동했다. 지하철 노선도 앞에서 시끌벅적하게 어디로 어떻게 갈지 정하려고 하는데 익숙한 말이 들렸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타지에서 처음 만나는 한국 사람이었다. 우리를 보아하니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데 어디로 갈지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말을 거신 거였다. 고향땅을 떠난 지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몇 년처럼 느껴졌던 걸까. 난생처음 보는 아저씨는 수십 년 만에 만난 친구를 보는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의 목적지를 말하자 아저씨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거기 가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며 일단 한인타운에 있는 YMCA에 가서 한 목사님을 찾아가 보라고 하셨다. (역시 책자에 나온 것과 현지 생활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 길로 곧장 한인타운으로 향했고 다행히도 그날  그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유스 호스텔에서 전전긍긍하는 우리의 사정을 듣더니 거처를 알아봐 주시겠다고 하셨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얼마 후, 우리는 캐나다에 이민 오신 지 얼마 안 된 노부부의 아파트 한 방을 렌트하게 되었다. 여전히 4인가족이 한방에서 자야 했지만 호스텔의 냉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창 밖으로 온타리오 호수가 보이던 작고 오래된 아파트였다. 호스텔 생활을 청산하고 아파트로 오던 날, 눈부시게 반짝이는 호수와 가족처럼 따뜻하게 우리를 받아주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우리 이민 생활은 눈보라로 뒤덮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짐을 푼 바로 다음 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듯 엄마는 말했다.



“내일 학교 가자.”



그렇게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캐나다 학교 첫날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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