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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Sep 22. 2024

5. 선생이나 되어볼까?

농담 아닌 진담


따각따각. 초등학교 시절, 걸음걸이 박자에 맞춰 복도에서 들리는 여선생님들의 구두소리가 좋았다. 단정한 머리에 하늘하늘한 스커트를 입고 오르간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선생님.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린나의 눈엔 선생님이 곧 디즈니 만화 속 공주였다. 선생님에 대한 분홍빛 로망은 그때부터 스멀스멀 싹 틔웠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읽었던 헬렌 켈러의 위인전도 이 꿈을 키우는데 한 몫했다. 시각과 청각을 잃은 헬렌 켈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도해 주셨던 설리번 선생님. 헬렌 켈러의 성공보다는 그녀를 옆에서 묵묵히 지지하고 응원했던 스승의 모습이 어린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아는 헬렌 켈러도 없을 테니까. 위인전 하나로 요동쳤던 것을 보면 그때 즈음부터 이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섰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랬던 나의 어렸을 적 꿈은 캐나다로 이민을 오고 고등학교 진학을 하며 판이하게 바뀌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 가운데 선생님이 되겠다고 희망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과에 있다 보니 거의 대부분 학생들은 의대 아니면 공대를 희망했다. 선생은 공부하다가 안되면 선택할 수 있는 플랜 B로 내려갔고, 우스갯소리로 “Those who can’t do, teach.” (자기가 하려는 걸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선생이 된다)라는 말도 떠돌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오만한 발상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던 것 같다. 더 큰 꿈을 이루고 싶고 더 멀리 나가고 싶은 마음. 선생은, 그것도 초등학교 선생님이면 더욱더, 도태한 직업이라는 편견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강단에 올라 아이들을 가르치기까지 얼마큼의 노력과 노고가 들어가는지 그때는 알리 없었으니까. 구차한 변명을 해보지만 과거의 나의 머리를 한대 콩 쥐어박고 싶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한 것이냐!



교대는 차선으로 세워놓고 일단 원하던 대학 생물학과로 진학했다.* 나름 자신 있다고 생각해서 택했던 생물학과였는데 날고 긴다는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의대에 가려면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들을 듣고 있자니 뼈저린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내 머리로 의사가 되기는 틀렸다.


지극히 평범한 내 머리로 두뇌회전이 우사인 볼트급으로 빨리 되는 친구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저 세상에서 온 것 같은 그들. 왜 내 주위에는 천재들만 있는 걸까. 문과도 아니고 이과도 아닌 난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이 왔다. 형편없는 학점으로 의대를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엉덩이 힘으로 밀고 나간다 하여도 거기서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는 슬픈 확신이 섰다.



그러다가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심리학 과목이 재미있어서 심리학 연구실에서 일을 해 봤다. 귀에 쏙쏙 들어온 심리학 이론과 수업시간에 공부했던 여러 사례에 비해서 실제 연구실의 삶은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직접 병원일을 경험하면 의대에 대해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 싶어 대학병원 산부인과에서 봉사를 해봤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의문만 늘어갔다. 창문도 없는 연구실로 향할 때마다, 병원 문을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훅 치고 들어오는 살균제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내 영혼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난 뭘 해야 하나. 그때 어렸을 적 로망이 떠올랐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교실을 진두지휘하던 선생님. 헬렌 켈러의 잠재력을 이끌어 낸 설리번 선생님. 의사 되기는 이미 글렀으니, 그럼 선생이나 되어볼까?


플랜 B로 물러나 있던 계획을 다시 들여다봤다. 현실적으로도 의대보다는 교대가 더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부랴부랴 졸업 1년을 앞두고 가르치는 일과 관련된 여름 아르바이트를 찾아봤고 때마침 어린이집 보조 선생님 포스팅이 눈에 띄었다. 곧바로 이력서를 보내 인터뷰를 했다. 급하게 사람이 필요했는지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름에 용돈도 벌고 아이들과 일 하는 것이 내 적성에 맞는지 알아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연락을 받자마자 기쁜마음으로 출근했다.



어린이집에 들어선 첫날, 왁자지껄 떠들며 웃고 우는 아이들의 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아이들의 말소리가 따발총처럼 연신 날리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가득 안고 문을 열었더니 거기에는 혼돈 속에서도 나름 규칙을 따르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까르르 웃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며 온몸으로 세상을 배우고 있는 아이들. 병원에서나 연구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알록달록한 그들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호기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빛 속에 무엇을 담는 것일까. 소음이라고만 느낄 줄 알았던 소리는 신기하게도 아름다운 멜로디로 내 마음에 파고들어 졸업반 대학생의 침울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연구실과 병원을 들어갈 때마다 증발했던 영혼이 어린이집에서 심폐소생술 후 다시 태어났다. 어린아이들이 나와 맞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순수한 눈빛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나에게 사랑을 주는 아이들에게서 방황하던 마음이 어디로 가야 할지 잡히기 시작했다. 선생은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했을 때 언제라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마음은 외치고 있었다. 이것이 원래부터 플랜 A였어야 한다고.  



여름 알바 후, 운 좋게도 토론토 대학 교대랑 연결이 되어있는 Lab School에서 파트타임 보조교사로 일을 할 수 있었다. 교육 연구실과 연결되어 있는 학교여서 그런지 최신 교육 이론들이 적극적으로 활성화되고 있었다. 활기찬 교실에서 선생님을 돕고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다 보니 나도 여기에 있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다. 베테랑 선생님의 수업을 볼 떄 마다 효율적인 학습이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실행해야하는지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본격적으로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생기기 시작했고 하루빨리 현장에 들어가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배우고 싶었다. 더 이상 선생은 차선책이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가야 할 길이었다.



아이들과 일을 해야한다는 확신이 들자 졸업을 앞두고 갈 수 있는 모든 교대에 원서를 넣었다.** 이력서에 고등학교 대학교 내내 교회 장애우 부서에서 봉사한 것과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서 보조로 일한 경험을 썼고, 자기소개서에는 나름대로 아이들과 일하면서 생긴 교육철학을 썼다. 요약해 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Educate이라는 단어의 기원은 라틴어의 Educare이다. 이것은 “기존의 있던 것을 끄집어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기관에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상대하며 선생은 지식을 주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아이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잠재적 능력을 꺼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교대에서 받는 교육을 통해 이 단어의 뜻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의 자아실현에 보탬이 되고 싶다.



경험도 있고 아이들과 일하면서 느꼈던 진심을 썼으니 쉽게 붙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선생이란 직업을 너무 얕잡아 봤던 걸까. 쉽게 될 줄 알았던 플랜 B였는데 이렇게 애간장을 태우다니.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8월이 되어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플랜 C를 세웠다. 교육과 관련된 경험을 쌓으며 재정비를 하고 내년을 준비하기로.



그렇게 단념을 하고 플랜 C를 준비를 하는데 예상치 못했던 킹스턴에 있는 Queen’s University에서 입학허가 연락이 왔다. 9월 학기 시작을 고작 2주 남겨놓았을 때였다. 토론토에서 3시간 떨어진 도시였기에 갑자기 준비할 게 많아졌지만, 지원했던 학교 중에서 이곳에서만 연락이 왔기에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선생이나 되어볼까?라는 건방진 발상에서 시작된 플랜 B는 결국 플랜 A가 되어서 나에게 돌아왔다. 이렇게 마음이 응답하는데 왜 줄곧 이 꿈을 플랜 B로 만들어 놓았던걸까. 어리석었던 과거의 나를 나무라며 앞으로 펼쳐질 모험을 준비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설렘으로 꽉 차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의대를 가려면 학부를 졸업한 후 원서를 넣는다. 학부 학점과 MCAT이라는 의과 시험 성적이 입학허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MCAT은 대부분 과학 과목에서 나오기에 의대 지망생들은 학부를 과학 쪽으로 택하는 경우가 많다. 서류심사에서 통과를 하면 면접이 있고, 여기서 좋은 성적을 거둔사람이 의대에 진학한다.



** 교대도 의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학부 졸업 후에 Consecutive Education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지원한다. 내가 다닐 당시에는 1년 과정이었는데 2015년부터 2년 과정으로 바뀌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학부전공과 같이 할 수 있는 Concurrent Education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경쟁도 높고 학부 전공과 교대 과정을 4년 안에 마쳐야 하니 꽤 강도 높은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나는 학부를 생물학과 심리학 전공으로 마치고, 선생이 되기 위해서 1년 교대 과정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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