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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Aug 03. 2020

더 늦기 전에

 수미는 평소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수미가 툭툭 던지는 말에 친구들이 상처도 쉽게 받고 또 자신도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상처를 받았다. 수미가 눈에 들어온 후로 나는 수미를 관찰하며 아이와 대화했던 내용을 복기한 후 그대로 옮겨 적었다. 따로 살고 있는 부모님을 대신하여 수미를 돌봐주는 사람은 고모였는데 고모님은 때때로 내게 전화를 걸어와 조카 키우기의 고충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 



<1> 

고모: 아이와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말 안 듣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나요.

: 화내고 윽박지르는 방법으로 아이를 굴복시켜 끌고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 템  포 쉬었다가 지도해보세요. 

고모학원 간다 하고 나가서 친구랑 전화도 안 받고 전화기는 꺼져있고 밤 8시가 넘어도 안 와서  피아노 학원에 데리러 갔어요. 애가 그런 애예요. 

속상하셨겠어요. 

고모: 제 아빠한테도 얘기했어요. 나는 수미에게 엄격하게 할 테니 너는 품어줘라. 

수미랑 싸우지 마세요. 아이는 이제 열두 살입니다. 고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아이는 저희 반 모두를 보아도 한두 명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높은 기준의 아이인 겁니다. 수미는 지극히 평범한 열두 살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시고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세요. 고모님께서도 건강관리, 마음 관리 잘하셔서 아이에게 지나치게 화내지 않도록 노력해주시고요. 

고모선생님과 얘기 나누다 보니 맘이 좀 편해졌어요. 

: 언제든 전화해 주세요. 사춘기 아이 키우는 일 젊은 엄마에게도 힘든 일이에요. 고모님 잘하고 계세요. 힘내세요.      



<2>

: 선생님이 아침에 봉사 활동하면서 수미가 고모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봤어. 근데 네 표정이 평소와는 달라 보이더라. 무슨 일이 있었니? 

수미어젯밤 잠을 잘 못 잤어요. 

왜?

수미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에요. 누군가 저를 노려보고 있는 느낌이 들면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결국 4시에 일어나서 학습지를 풀었어요. 

: 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수미: “…….”  

: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니? 

수미친구랑 놀다가 학원에 늦게 가서 고모한테 혼이 났어요. 

: 고모한테 전화 안 왔었어? 

수미: 휴대폰을 친구 가방에 둬서 전화 왔는지 몰랐어요. 

: 어제 고모랑 상담했었는데 고모는 네 전화가 꺼져 있었다던데? 

수미그 게 이상해요. 전화 안 왔었거든요. 

그랬구나. 그럼 집에 가서 어떻게 되었니? 

수미고모한테 많이 혼나고 그랬어요. 

: 혼낼 때 고모는 어떻게 혼내시니?

수미: 어제는 책으로 머리 맞았어요. 

: 그럼, 가장 최근에 맞은 적 또 있니? 

수미네, 일주일 전에요. 

: 선생님한테 보여줄 수 있니? 

수미(왼쪽 허벅지를 보여주며) 효자손으로 맞은 거예요. 

: 가장 심하게 맞거나 혼난 적 얘기해줄 수 있니? 

수미: 고모가 말을 안 듣는다고 줄넘기로 제 몸을 묶었어요. 한 번은 봐주는 편인데 두 번째는 실제로 하는 편이라 무서워요. 

: 고모가 다음번엔 어떻게 한다고 했는데? 

수미제 몸을 밧줄로 묶어 죽여 버리겠다고요. 

: 평소에도 자주 때리시니? 

수미: 제가 고모 말을 안 듣거나 자기가 화나면 욕하고 때려요. 그때 빼고는 좋아요. 

: 수미는 이렇게 고모랑 사는 거 어때? 힘들지 않아?

수미: 근데, 아빠는, 아빠는 더 무서워요. 예전에 엄마랑 아빠랑 왜 이혼했냐고 엄마께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엄마가 그랬어요. 아빠가 너무 무섭게 화를 잘 내고 욕을 잘해서래요. 

: 고모한테 맞으면 아빠한테 그래서 말 안 했니? 

수미네, 아빠한테 혼날까 봐요. 

수미야,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해. 네가 고모 말도 안 듣고 실망시키고 한 건 잘못했지만, 네가 이렇게 혼날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 너 자신이 ‘난 나쁜 아이야’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3>

 나는 아이와 대화 후 1366에 바로 신고하고, 아동보호 전문기관과 상담을 시작했다. 이틀 후 두 분의 상담사님이 오셔서 아이를 상담하셨다. 한 달 후, 다시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수미(활짝 웃으며) 선생님, 저 행복해요. 요즘 고모랑 사이가 좋아졌어요. 

어머나! 잘됐구나. 무슨 계기가 있어?

수미: 그분들이(상담사) 집에 다녀가신 뒤로 고모랑 관계가 좋아졌어요.    


  

수미의 고모님은 한동안 신고자로 나를 의심하시고는 무척 허탈해하시기도 하고 협박도 하셨다. 무섭다던 그 아버님이 집으로 찾아오지는 않을까 주말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떨었다. 하지만, 상담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어느 날부턴 가는 전화도 뚝 끊겼다.  

    

아이와 헤어지고도 나는 가끔 꿈에 수미를 보았다. 아이는 밧줄로 꽁꽁 묶여 베란다에 나가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이의 말만으로도 그 장면은 내게 깊이 남았던 것 같다. 시작은 아침에 우연히 본 아이의 표정에서였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어두운 표정 이면에 줄로 묶여있었던 아이의 상황이 숨겨져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아이의 손을 잡아 끌어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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