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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Jul 27. 2020

어설픈 다정

 처음으로 맡은 6학년이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느낌이 왔었다. 이 아이들 쉽지 않겠구나. 특히 여자 아이들이 무리 짓기가 심했고, 선생님 기를 누를 정도의 센 아이들도 느껴졌다. 은지는 기센 여자아이들 무리에서 한눈에 봐도 끼지 못하는 소심한 아이였다. 워낙 말이 없어서 아이의 생각을 들을 수가 없어 교환일기를 쓰자고 먼저 말을 걸었다. 또래에 비해 차분하고 그림도 무척 잘 그리는 손이 야무진 친구라 마음을 열게 되면 꽤 싶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은지는 2006년 4월 19일에 시작한 첫 페이지에서 선생님과 처음으로 교환일기를 쓰게 되었다며 설레어하고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기며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닫으면서 그동안 이 일기가 왜 책장 구석에 있었으며,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안 읽었는지 알게 되었다. 교직 3년 차. 혹독한 6학년 사춘기 아이들을 맡아 나는 좌충우돌했었다. 특히 이때 만난 아이들은 나에게 6학년 기피 트라우마를 준 학생들이었다. 2006년의 기억을 나는 의식적으로 드러내기 싫어했던 듯하다. 은지와 나눈 소소한 추억까지도 함께 묻어버렸던 것을 보면. 



은지가 교환일기를 써서 내 책상 위에 갖다 두면, 나는 틈틈이 댓글을 써서 은지의 책상 속에 넣어두었다. 은지를 특별하게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가 다른 사춘기 소녀들에게 어떻게 비췄을까? 지금처럼 바로 알 수 있었다면 은지가 조금은 덜 힘들었을까? 나는 그때 아이들에게 매일 일기를 쓰게 하고 매일 댓글을 달아주었었다. 그래서 은지와 나누는 특별한 일기장에 아이들이 크게 의미 부여하진 않을 거라고 혼자 결론지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은지는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줄곧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도 갈라졌고 기센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몇 달을 견뎠지만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그 후론 점심마저 걸렀다. 은지가 점심을 거르고 있다는 것을 한 달이나 몰랐다가 교환 일기장에 아이가 털어놓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 일기를 읽던 날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는 동 학년끼리 모여서 회의 겸 함께 식사를 했었다. 그래서 일단 식당 의자에 아이들 앉혀놓고 나면 6학년 아이들이니 으레 잘 먹겠거니 하고 신경도 안 썼다. 한데 한 달이나 점심을 안 먹었다니. 줄지어 식당에 가는 길목에서 홀로 화장실로 빠져서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숨어있거나 점심을 받아도 대충 깨작이다 음식물을 쏟고 교실로 돌아가 버린 모양이었다. 아이의 일기를 읽은 후 나는 바로 다음날부터 점심을 강제로 모둠별로 먹게 했다. 그러자 은지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은지는 점심시간에 함께 밥을 먹을 친구가 없어서 밥을 먹지 않았던 것이다. 



은지와 교환일기를 쓰는 일이 꼭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 내 짐작은 적중했다. 하지만, 내가 은지에게 남긴 부분을 읽으면서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아파왔다. 어리숙하고 주의 깊지 못하고 다정하기만 했던 나를 어쩌면 좋을까. 나는 오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은지가 졸업하며, 교환일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었다. 나 역시 처음으로 제자와 나눈 교환일기였다. 욕심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부끄럽기도 했다. 아이에게 평생 남을 수도 쉽게 버려질 수도 있었다.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을 나눴다. 어쩌면 서로 깊게 사랑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일기장에서조차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아이는 친구들에게 눌려 내게 더 다가오지 못했고, 나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 애 부모가 부담스러웠다. 



은지가 친구들과 놀다가 디카를 잃어버린 사건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크게 실망하게 된다. 마지막에 은지의 디카를 만졌던 친구가 책임을 지는 식으로 일이 번져 부모들끼리도 싸움이 크게 났다. 당시 40만 원짜리 카메라를 형편이 어려운 친구가 물어내느라 전단지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되었다. 은지는 사건을 이렇게까지 만든 부모님을 원망했다. 그리고 다시 고립되어버렸다. 그리고 우리의 교환일기도 끝이나 버렸다. 그 당시 나는 은지의 괴로움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설렘으로 시작되었던 교환일기의 끝은 끝이 아닌 듯 밍숭 하게 끝나 있다. 


은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력감이 느껴진다. 왜 좀 더 지혜롭지 못했을까? 왜 좀 더 용기 내지 못했을까? 왜 말하지 못했을까? 우리 여기서 헤어지지만 너의 6학년을 잘 지켜주지 못했지만 너의 앞날을 힘껏 응원할 거라고. 너와 함께 일기를 나눌 정도로 네가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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