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브티 Aug 10. 2020

날려 보내며

드디어 방학을 했다.  졸업 전 마지막 수업 날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앞두고 나는 깊이 심호흡을 하고 입 꼬리에 힘을 주었다. 찡찡하고 화난 얼굴로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교직 초반 나는 반 아이들이 채 10명도 되지 않은 학급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조카처럼, 동생처럼 그리 아이들을 대했고, 내가 마음 쓴 만큼 아이들은 나를 사랑해주었다. 겨울방학쯤 되면 서로 사랑이 익숙해져서 말없이도 가만히 껴안고 마음을 전하는 게 가능하기도 했다.      


학교를 옮기고, 33명 아이들을 만났다. 게다가 6학년. 아이들은 기말고사를 치른 뒤엔 6학년 문제집을 죄다 버리고, 반 배치고사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마음은 중학교로 가있고 새로 펼쳐질 생활에 대해 벌써부터 고민했다. 그런 아이들 마음을 읽지 못했다. 예전처럼 서로 깊이 사랑할 수 있는데, 왜 되지 않은 것일까? 아이들을 탓하고, 나를 탓했다.     


6학년은 날려 보내는 학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도, 굳이 기억하려 들지 않아도 좋았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지 않아도 좋았다. 내 사랑을 마음에 품든, 버리든, 어떻게 해도 좋았다.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마음을 닫고 그로 인해 스스로 고통받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도 어찌 되었건 아이들은 사랑받으며 자라야 한다. 지금의 모습이 완성된 모습이 아니기에 지금보다 나은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며 나는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으리란 것을 깨닫는다. 더욱 껴안고 더 사랑해 줄 것이다.      

마지막 일기 검사를 하는데, 내 얼굴이 붉어지는 한 일기를 만났다. 우리 반에서 제일 말없고 얌전한 남학생의 일기.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날씨가 부쩍 추워지는데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선생님을 만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방학을 앞두고 있다니까 아쉬워요. 

선생님과 같이 계속 생활하고 싶은데 말이에요. 

선생님이 처음 들어오셨을 때 저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선생님과 생활하고 싶어요. 

항상 선생님과 같이 생활하고 싶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예전에 선생님이  TV에 나온 것을 보고 아, 나도 저런 선생님 만났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6학년 때 선생님을 만나서 참 기뻤어요.      

선생님께 제가 무엇을 질문할 때 선생님을 바라보면 정말 예쁘고 아름다우세요. 

그래서 집에 와서도 선생님 생각을 자주 하긴 해요. 

또 선생님은 마음씨가 곱고 아름다워서 보기가 좋아요. 어떨 때는 선생님이 교탁에 앉아서 일기검사를 하실 때 햇살에 비친 선생님의 아름다운 모습에 제가 흠뻑 선생님에게 빠진 게 기억이 나요. 이런 것들 때문에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나 봐요. 말하기가 어려워서 일기장에 쓴 것이에요. 며칠 있으면 졸업식을 하고, 선생님과 헤어져 못 보게 된다니 정말 슬퍼요. 졸업하기가 싫고 선생님과만 같이 있고 싶어요.

또, 선생님이 도와주라는 일은 꼭 하고 싶어요.      

선생님, 그동안 진심으로 많이 사랑했어요. 

이 마음 세월이 가도 계속 영원히 변치 않을 거예요. 

선생님, 제가 사랑했던 마음 기억해주시길 바라요. 

아, 내일 방학하면 선생님을 보지 못할 수 있어서 선생님 모습이 정말 보고 싶겠네요. 

세월이 간다 해도 제가 6학년 때 선생님을 사랑했던 마음이 잊히지 않을 거예요.

 아, 내일 학교 가면 선생님을 바라보기가 정말 부끄러울 거예요. 

선생님, 그럼 언제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시며 항상 건강하세요. 

아차, 빼먹은 게 있는데 제가 여태 동안 선생님께 제대로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아서 이 날은 제가 선생님께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릴 수가 있는 날이라서 참 기뻐요.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 아이의 진지한 성격을 잘 알기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동 학년 선생님들은 야유를 보내고, 친구들은 마구 놀리기도 했다. 사춘기 6학년 남학생에게 받아 본 최초의 러브레터. 아이의 두근거림이 내게까지 와 전해진다. 내가 선생님을 이성으로 좋아했던 것이 언제였나. 중,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 두 분이 있었는데…….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가슴 떨리고 좋아했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의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우리 친구는 그때 내 마음과는 조금은 다르겠지. 유난히 마음 표현이 서툰 아이들을 만나 얼음덩어리를 품고 한 해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어딘가에서는 이렇게 사랑의 싹이 텄었구나. 볼펜을 들어 꾹꾹 정성껏 댓글을 써주었다.      

고맙다, 친구야. 이제 훨훨 날아가렴.


작가의 이전글 더 늦기 전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