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는 6학년 첫날 전학을 왔다. 키가 나만큼이나 크고 눈빛이 강렬했다. 남는 자리가 하나 있었다. 모둠으로 구성하면 그 애만 여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남학생이라 마음에 걸렸지만 뾰족이 다른 대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앉아보고 힘들면 선생님한테 말하라고 일러뒀다.
일기장으로 아이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에 매일 일기 숙제를 내줬다. 그리고 혹시 선생님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날에는 일기장 맨 위에 별표를 그려놓으라고 했다. 그러면 읽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처음엔 별표가 보이는 일기장이 없었다. 이제 막 만난 선생님을 경계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아이들도 일기 숙제에 익숙하지 않아서 속 이야기를 쓰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한 두 달 지나면서 차츰 별표가 그려진 일기들이 보였다. 그런 일기를 만나면 난 흐린 눈을 하고 다음 일기로 넘어갔다. 일기를 안 볼 특별한 장치는 없었기에 순전히 내 양심에 달린 일이었다. 흐린 눈으로 봐도 몇몇 단어들은 보였다.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이야기였겠지만 내 눈에는 평범한 고민들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습 시간에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일기장 검사를 시작한 내 눈에 ‘선생 그 년’이란 글자가 쓰인 연희의 일기장이 들어왔다. 얼굴에서 핏기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날 정도로 당황했다. 3년 차 선생은 이런 일에 면역이 전혀 없었다. 뭐지? 하는 사이에 아이의 일기를 읽고 있었다.
“나를 남자들 사이에 던져 놓다니. 선생 그년 나중에 아들, 딸 낳으면 찾아가서 밟아 죽여버리겠어.”
악에 받친 아이의 일기를 한 문장만 더 읽었는데도 눈앞이 아찔했다.
이런 정도의 분노를 살면서 받아본 적이 없다. 자리를 바꿔주지 않은 문제로 화가 났다는 것은 알겠는데 표현이 너무 과했다.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책상에서 일어나 교탁에 선 내 눈에 그때서야 아이 일기장 윗부분에 그려진 별이 보였다. 별은 아이 마음처럼 새까맣게 연필로 칠해져 있었다. 연희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수업을 했다. 그 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쉬는 시간 틈틈이 일기 검사를 하고 집에 가기 전에 일기장을 나눠줬었지만 그 날은 정신이 없어 더 이상의 검사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후 망연자실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새 학교에 옮겨 만난 첫 아이들이었다. 속을 터놓을 동료도 없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일단 그냥 두기'였다. 그런 일이 없었던 마냥 그 애를 대했다. 하지만 속으론 그 애가 무서웠다. 그 애가 쏟아낸 독설이 너무 아파 감당이 안됐다. 연희 일기장엔 점점 별표가 된 일기가 늘어났지만 난 첫 번째 일기를 읽은 이후로는 그 애 일기를 읽지 않았다. 읽을 자신도 없었다. 내가 상대를 해주지 않으니 아이도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춘 듯했다. 기세 등등 나를 노려보던 눈빛이 한결 누그러짐을 느꼈다. 1학기가 다 가도록 나는 그 애를 쳐다보지도 말도 걸지도 않았다. 좋은 방법이 아니었지만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방학이 다가올 무렵 연락도 없이 연희의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다. 어머니는 무척 지쳐 보였다. 연희 아버지는 우리 학교의 축구부 코치님이셨다.
“선생님, 저희 가족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 생활고를 심하게 겪었어요. 아이 아빠의 코치 계약도 깨끗하게 이뤄지지 않아서 그동안 친척집을 전전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 연희가 어른들의 안 좋은 꼴을 많이 봤어요. 아이 아빠와 저도 아이 앞에서 좋은 꼴은 못 보였지요. 지금은 제가 일을 시작하며 얹혀 지내던 친척 집에서 나와 살 수 있게 됐어요. 제 아빠에게 함부로 하는 친척 어른들에게도 한 마디 할 정도로 대찬 성격이라 선생님께 어떻게 했을지 상상이 가긴 합니다.”
어머님은 내게 별말씀을 안 하시고 집 안의 사정만을 말씀해주시고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하시고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님께 일기장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님이 다녀간 다음에서야 나는 그 애 눈을 보고 수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종종 맨 앞에 앉아서도 “선생 이 **년!”이런 욕을 실험관찰에 아무렇지 않게 쓰며 수업을 듣는 아이가 불편했지만 이렇게 거칠어 질만큼 힘든 삶이 있었겠거니, 하고 그냥 넘겼다.
연희가 졸업하고 몇 년 이 더 지난 어느 여름.
나는 우연히 김형경 소설 ‘천 개의 공감’을 읽었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전학을 간 학교에서 작가는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만난 담임 선생님이 일기장을 건네주며 글을 쓰라고 했다. 작가는 속에 있는 모든 욕과 분노와 생각들을 그곳에 쏟아냈다고 했다. 담임은 일기를 검사하면서도 읽은 듯 안 읽은 듯 작가의 분노와 반항을 견뎌냈다. 작가는 일기장이 40권이 넘어서야 분노가 옅어졌고 힘든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그때의 담임 선생님을 떠올렸다. 그분은 온갖 욕설과 분노로 점철된 그 일기를 읽으며 어떤 마음이셨을까?를.
나는 그때 연희에게 마음을 다쳤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관계를 중요시하고 학생과 마음을 나누는 삶을 꿈꿨던 내게 연희는 너무 낯설고 두려운 존재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욕을 하는 아이라면 사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어른들’에 대한 분노였을텐데 그것을 몰랐다. 내가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나도 김형경 작가의 담임처럼 그렇게 의연한 모습으로 아이의 분노를 받아내고 ‘멋진 어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지금도 새로운 반을 맡게 되면 나는 혹시나 연희 같은 학생이 있을까 봐 몹시 긴장한다. 아마 몇 번쯤 더 만났던 것도 같다. 하지만 연희 이후로 내게도 기 세고 내게 무조건적으로 반항하는 학생에 대한 내성이 생겼나 보다. 연희만큼 강렬하게 남는 학생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말이다.
아이의 분노에 휩쓸리지 않는다. 섣불리 동정하지도 다가가지도 않는다. 현재 그 아이의 모습을 본다. 학교 안에서의 모습으로 아이를 판단하고 도울 일은 돕고 훈육할 일은 훈육한다. 아이 개인에 집중하지 않는다. 학급의 일원으로 보고, 학급의 규칙을 함께 세운다. 감정으로 대하지 않고, 학급 안에서 잘 지내기 위해 해야 할 적절한 책임과 의무를 주고, 기여할 수 있도록 한다. 칭찬과 격려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게 한다.
아이만의 진실을 알아가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아이가 가진 진실을 아는 것만큼 교사로서의 내 삶도 지켜져야 할 귀한 가치라는 것을. 내 마음 다치지 않게 나는 오래오래 이 일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