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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May 25. 2020

그 곳으로

 

집에 있는 가장 오래된 앨범을 넘겨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사진이 빨간 조끼를 입은 세 살 때의 내가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보면 나무 울타리가 보인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울타리 너머에는 시골치고는 꽤 큰 초등학교가 있었다. 22년이 흘러 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첫 발령받은 곳이 바로 그 학교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 학교에 갔을 때 마침 대운동회를 하고 있었는데 고싸움을 꽤나 성대하게 하고 있었다. 흙먼지가 뿌옇게 이는 사이에 제법 큰 오빠들이 굵은 줄로 엮은 고 위로 올라붙어 서로를 밀고 있었다. 백군, 청군으로 나뉘어 목청 높여 응원하던 소리도 함께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어린 시절의 내게 남아있는 압도적인 기억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교사가 되어 어린 기억으로 학교에 들어서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은밀한 아이들의 세계로 느껴지게 했던 나무 울타리들은 키가 작은 회양목으로 바뀌었고, 고가 회오리치며 흙먼지가 일어났던 운동장엔 잡초가 가득했다. 단층으로 한 학년에 한 학급 밖에 남아있지 않은 작은 학교. 아침인데도 햇볕이 쨍했다. 손부채를 만들어 이마에 얹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학교를 감싸고 있는 넉넉한 산자락도 보였다. 학교에서 10분 거리에는 바다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바람에 바닷 내음이 묻어있는 듯 했다. 교생 실습 때만 입었던 투피스 정장은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만 입던 내게 아직도 겉돌고 있었다. 순간 손에 땀이 났던 것도 같다.      

 나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신문방송학과에 가서 기자를 할까, 법대에 가서 변호사가 되어볼까 꿈은 창대했지만 고3 스트레스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내 시험도 아닌 것처럼 그 중요한 수능을 망치고야 말았다. 어쩐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사람처럼 무심히 지역에 있는 사립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쓸데없는 불문학을 전공해서 어디다 쓰겠냐?”     


 아빠는 타박이셨지만 대학에 가자마자 나는 도서관에 드나들며 랭보와 보들레르,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읽고, 샹송을 찾아 불렀다. 하지만 3학년 때부터 취업을 알아보기 시작하니 어설픈 불어실력으로는 딱히 지원할만한 곳이 없었다. 교직이수를 하고 모교에 실습도 다녀왔지만 불어 교사가 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는 일처럼 어려워보였다.      


그러다 4학년 때 교대편입시험을 알게 되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교대에 합격하게 되었다. 자주 있는 시험이 아니었던 만큼 경쟁률이 높았고 합격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태어나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본 건 처음이었다. 공부하는 시간이 힘들었지만 고3 때처럼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다. 하면 할수록 즐거웠고 꼭 붙을 것만 같았다. 매일 밤 잠들면서 아이들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학생들 앞에서 모두가 감탄하는 환상적인 수업을 마치고 감격에 겨워하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교 3학년생이 되었다. 힘들 게 시험을 치르고 들어갔지만, 수능을 치르고 들어오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는 편견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편입생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노력하는 교사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증명이었을까? 나는 다른 학부생들에게 나의 자격과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나보다. 사실 수능을 치고 들어간 아이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서 더 그런 마음을 품었다. 나도 너희들처럼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나를 충분히 자랑스러워했어도 되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힘들었다.   

   

4학년까지 무사히 마치고 임용고시를 치른 후 고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는 마냥 기뻤다.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 나의 자리를 찾은 듯 그 전까지 나를 짓누르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군내버스를 타고 학교 앞에서 내려 교문을 걸어 들어갈 때 내 마음 속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여기까지 오게 된 나에 대한 자부심과 그림자처럼 남아있는 핸디캡이 뒤엉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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