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살바토레, 바르트, 동양산수화, 김홍도, 주상관매도
살바토레는 해석할 수 없는 존재다.
그는 수도원의 이성적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고, 기호 체계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앞선 1장에서 우리는 그를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통해 '배제된 진리의 목소리', 담론의 바깥에서 울리는 기호의 잔재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한다.
그의 말은 이해되지 않지만 자꾸 되새김질하게 되고, 그의 존재는 불쾌하지만 뇌리에 깊이 남는다. 왜일까?
왜 해석되지 않는 자가 우리 안에서 해석을 자극할까?
이 장에서는 그 질문을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 동양 산수화의 여백 미학을 통해 조명한다.
살바토레는 의미가 없는 기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해석을 끌어내는 과잉기호이며, 정형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보는 이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여백적 상징이다.
살바토레는 말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Penitenziagite (회개하라)! 그대의 anima (영혼)를 쏠기 위해 용이 이 땅에 내릴 터인즉! 죽음은 super nos (우리 위에) 있으니 어이할꼬. 오시어서 nos a malo (우리를 악으로부터) 그리고 죄로부터 구하시도록 santo pater (거룩한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하, 그대는 Domini Nostri lesu Christi(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negromanzia (강신술)를 좋아하는구나...」
그의 언어는 라틴어 단어가 튀어나오다가 갑자기 독일어식 악센트로 끊기고, 이탈리아어 문장 구조가 파괴되며 프랑스어의 어순이 섞인다. 심지어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까지 뒤섞여 나온다.
그의 언어는 문법도, 대상도 없는 채로 공기 중에 흘러 다니는 기표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자꾸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혹시 이 말 안에 어떤 상징이 있는 건 아닐까?
이 사람, 사실은 진실을 알고 있는 거 아닐까?
→ 이것이 바로 바르트가 말한 해석의 욕망, 즉 기호의 빈자리에서 시작되는 과잉 해석의 구조다.
롤랑 바르트는 『기호학의 원리』와 『신화론(Mythologies)』에서 현대 사회의 기호 체계가 '뜻 없는 기표'에 의미를 과잉 투사함으로써 신화를 생산한다고 주장했다.
원래 기호란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의 결합이다.
기표는 형태, 소리, 이미지와 같은 물리적 실체를 의미하고, 기의는 그것이 지시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하트 모양(기표)은 사랑(기의)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르트에 따르면,
현대의 많은 기호는 기의 없이 기표만 남아 떠돈다.
그리고 그 빈 기호 위에 해석자의 욕망이 덧입혀지며, 그럴듯한 신화(myth)가 만들어진다.
"신화는 역사를 자연으로 변형시킨다.
그것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게 한다."
— 롤랑 바르트, 『신화론』
살바토레는 그런 구조의 살아 있는 예다.
그의 말에는 명확한 기의가 없다.
그러나 그 공백은 독자와 등장인물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비롭고 위협적이며,
숨겨진 메시지를 지닌 자로 해석된다.
→ 그는 의미 없는 기호이기 때문에,
모든 의미를 덧입을 수 있는 '과잉기호'가 된다.
* 과잉기호
바르트의 ‘과잉기호’ 개념은 그의 저작 시기와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신화론』에서 바르트는 기호가 원래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의미(1차 기의)를 잃고 ‘비워진 기표’가 된 뒤,
여기에 사회적·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과잉 투사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구성된 의미가 마치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신화’가 탄생한다. 즉, 기호는 본래의 의미를 비운 채 새로운 의미로 충만해지고, 이는 신화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반면, 후기 바르트는 기호가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로 환원되지 않고, 복수적이고 불확정적인 의미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의미의 과잉’ 상태에 주목한다. 여기서 과잉기호란 기표가 자유롭게 유희하며, 독자나 관객의 해석에 따라 무한히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역동성과 개방성을 의미한다.
두 관점 모두 기호가 단순한 의미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이나 해석 행위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생성하거나 덧씌워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드소가 기록한 살바토레의 말을 다시 읽어보자:
"뒷날,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어느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산 여러 나라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살바토레가 모든 나라 말을 하는데도 그 말은 어느 나라의 말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그는 나름대로 자신이 접한 언어들의 기본 뼈대를 이용해 자신만의 말을 하나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살바토레의 언어는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여러 언어의 혼합: 그는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를 뒤섞는다.
어느 언어도 아님: 그러나 그 섞임은 어느 한 언어의 문법이나 체계를 따르지 않는다.
그만의 언어: 그것은 새로운 언어가 아니라, 타인에게는 언어가 되지 못한 기호들의 집합이다.
이런 특성은 바르트가 말한 '텍스트의 쾌락'과 연결된다.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의미가 확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텍스트가 해석자에게 특별한 쾌락을 준다고 말한다.
살바토레의 언어는 바로 그런 쾌락의 원천이다.
그것은 확정된 의미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의 공간을 열어준다.
수도원의 언어는 엄격한 라틴어 문법과 신학적 해석의 틀 안에 갇혀 있다. 반면 살바토레의 언어는 규칙 없이 자유롭게 흐른다. 그 불규칙함이 오히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의미의 불확실성은 우리 뇌의 도파민 체계를 활성화시킨다.
도파민은 우리가 불확실한 것과 새로운 것을 탐구하도록 촉진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우리 뇌는 '달콤한 보상이나 강력한 처벌'보다
'새롭거나 불확실한 자극'을 제공하는 것에
더 큰 학습 효과와
근본적인 행동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Fiorillo, 2003).
살바토레의 말은 바로 이런 불확실성의 보고(寶庫)이며, 그의 말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우리 뇌의 도파민 체계를 자극하는 일종의 퍼즐 풀이와 같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쾌감을 경험한다.
바르트의 기호학을 통해 살바토레의 언어를 읽었다면, 이제는 그의 '몸'과 '존재 방식'을 동양의 미학,
특히 산수화의 여백 개념으로 살펴보자.
동양의 고전 산수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려진 것보다 그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 여백은 때로 물, 때로 안개, 때로는 시간이다.
작가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지만, 보는 이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리게 된다.
중국 북송시대 화가 곽희는 이렇게 말했다:
산수화에서 빈 공간이 없으면
기(氣)가 통하지 않는다.
기가 통하지 않으면 산수는 죽은 것이다.
이는 단순한 미학적 원칙을 넘어선다.
곽희가 말한 '기(氣)'는 동양 사상에서 우주를 채우고 모든 생명을 관통하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여백은 이 보이지 않는 기의 흐름을 위한 공간이다.
여백은 비어 있지만, 그 비어있음이 오히려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여백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림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것은 비어 있음으로써,
오히려 가장 많은 것을 품는다.
조선 시대 화가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는 이런 여백의 힘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64cm 높이의 이 대형 그림에서, 물과 하늘을 구분할 수 없는 광대한 여백이 화면의 70%를 차지한다.
김홍도는 이 거대한 여백을 통해 시공간의 경계를 흐리고, 마치 블랙홀처럼 관람자를 그림 속으로 빨아들이는 중력장을 형성한다.
여백은 서양 회화의 공백과는 다르다. 서양 회화에서 빈 공간은 채워지지 않은 '부재'의 상태지만,
동양 산수화의 여백은 "흐르는 기(氣)"로 가득 찬 '충만'의 상태다. 여백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한 시공간,
즉 '무(無)'를 표현한다.
살바토레는 그런 여백과도 같다.
그의 말은 해석되지 않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해석을 상상하게 되고,
그의 몸은 이해되지 않지만, 그 낯섦 속에서 의미의 가능성을 더듬는다.
그는 그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그 위에 무언가를 그리게 된다.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여백이 우리 뇌를 사로잡는 이유는 현대 신경과학의 '예측 부호화(predictive coding)' 이론과 '자유 에너지 원리(free energy principle)'로 설명할 수 있다.
칼 프리스턴(Karl Friston)이 발전시킨 이 이론들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단순히 감각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계에 대한 내부 모델을 구축하고 지속적으로 이를 업데이트한다(Friston, 2010).
뇌는 불확실성과 엔트로피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여백과 같은 정보가 부족한 공간을 마주했을 때, 뇌는 기존의 경험, 기억, 문화적 맥락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그 공간을 채우려 한다.
이 과정에서 뇌는 '베이지안 추론(Bayesian inference)'을 활용하여 가장 가능성 높은 해석을 생성한다(Clark, 2013).
이러한 예측 과정은 뇌의 여러 영역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두엽은 기대와 가설을 생성하고, 측두엽과 두정엽은 기억과 공간 정보를 제공하며, 시각피질은 이러한 하향식 예측과 상향식 감각 정보 사이의 차이(예측 오류)를 계산한다.
이 과정을 통해 여백은 단지 공간이 아니라,
우리 의식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시간성을 가진 장(場)이 된다.
[예측부호화, 자유에너지, 베이지안 추론에 대해서는 이 글 말미 주석으로 상세설명- 뇌의 세 가지 원리로 보는 파레이돌리아 현상]
이 절은 아래 휘각님의 글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살바토레의 언어만큼이나
그의 몸도 기호학적으로 읽을 수 있다.
『장미의 이름』에서 그는 이렇게 묘사된다:
구부정한 몸에 검게 그을린 얼굴,
수염이 없고 턱은 앞으로 튀어나왔으며
콧구멍은 넓적했다.
그의 눈은 작고 파랗게 빛났다.
그는 기형적이다. 그의 몸은 수도원의 정제된 질서 속에서 불협화음처럼 존재한다.
그는 '규칙적인 몸'의 반대편, 바깥에 위치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질감이 그를 특별하게 만든다.
산수화의 여백처럼, 그의 몸은 질서가 부재한 곳,
규범이 닿지 않는 곳이다.
그 공백에서 의미의 가능성이 무한히 열린다.
살바토레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라기보다 말의 잔향, 혹은 언어의 실패가 남긴 기호의 그림자다.
걷는다. 그러나 그것은 체계적인 이동이 아니라 질서의 바깥에서 흘러 다니는 동선이다.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어떤 범주에도 맞지 않는, 정의하기 어려운 형태다.
그는 기호로 해석되지 않기에, 기호 이전의 기호, 의미 이전의 상징, 그려지지 않은 여백이 된다.
→ 그래서 우리는 더 오래, 더 깊이, 더 조심스럽게 그를 해석하려 한다.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는 놀랍도록 날카로운 해석자다. 그는 흙 묻은 발자국에서 복잡한 사건의 전말을 추론하고, 단어 하나로 사건 전체를 꿰뚫어 본다.
그는 중세의 셜록 홈스다.
그러나 살바토레 앞에서는 멈춘다.
그는 여러 언어를 뒤섞어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안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대목은 중요하다. 이성의 화신인 윌리엄 수도사조차 살바토레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논리는 멈추고, 해석은 공중에 붕 떠버린다.
이것이 바로 과잉기호의 완전한 작동, 여백으로서의 침묵이 독자와 주인공 모두를 압도하는 순간이다.
살바토레 앞에서 윌리엄 수도사의 해석이 실패한 것은 단순한 좌절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에서 말했듯,
저자의 의도가 사라질 때
독자의 해석 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된다.
살바토레는 작가의 의도, 체계적 의미가 사라진 기호다.
→ 그 빈자리에서 우리의 해석은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장미는 이제 이름만 남고,
우리는 오직 벌거벗은 이름만을 쥐고 있다.
에코의 소설은 이 유명한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우리가 결국 실체가 아닌 이름만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살바토레는 이 진실을 체현한 인물이다.
살바토레는 말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의미는 없지만, 해석은 생겨난다.
기호는 실패했지만, 신화는 작동한다.
살바토레는 이 두 전통의 교차점에 있다.
그는 기호학적 역설의 구체화된 인물이며,
이해 불가능성이 해석의 동력이 되는 존재다.
살바토레를 통해 우리는 기호의 본질적 한계와,
그 한계가 오히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여는 역설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바르트가 말한
'쓰여질 수 있는 텍스트'(scriptible)의 인간적 현현이다. 닫힌 의미가 아니라 열린 해석을 촉발하는 존재.
그는 동양 산수화의 여백처럼,
가장 적게 말함으로써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존재다.
* ‘쓰여질 수 있는 텍스트’(scriptible)
롤랑 바르트가 말한 ‘쓰여질 수 있는 텍스트’(scriptible)란 독자가 단순히 저자의 의도를 해석하고 소비하는 수동적인 존재에 머무르지 않고, 텍스트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는 능동적 주체가 되는 열린 텍스트를 의미한다.
이러한 텍스트는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읽히는 텍스트’(lisible)와 달리, 의미가 복수적이고 불확정적이며, 언어의 유희와 해체, 그리고 저자의 죽음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 동시에 자신의 해석과 상상력으로 텍스트를 ‘다시 쓰는’ 창조적 행위를 수행하며, 이 과정에서 텍스트는 끊임없이 새롭게 생산되고 재구성된다.
즉, 쓰여질 수 있는 텍스트는 독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문학의 본질을 능동적 의미 생산과 독자의 창조적 참여로 확장시키는 개념이다.
시간을 붙잡으려는 서구적 욕망과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양적 지혜가 만나는 이 교차점에서, 살바토레는 마치 시공간의 블랙홀과 같은 중력장을 형성한다.
그는 의미의 부재로 인해 오히려 모든 의미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에코의 소설에서 살바토레가 그토록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이상한 인물'이 아니라,
말과 존재의 본질, 의미와 해석의 근원적 관계를 질문하게 만드는 철학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해 불가능한 언어는 오히려 우리의 도파민 체계를 자극하며, 그의 여백 같은 존재는 우리 뇌의 무의식적 추론을 활성화시켜 의미 창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 이 모든 구조는 결국 살바토레가
'그림자'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다음 장에서는 살바토레를 칼 융의 분석심리학, 특히 '그림자' 개념을 통해 살펴본다.
인간의 뇌는 불확실한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체계를 발달시켰다. 모호한 패턴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은 단순한 착각이 아닌,
뇌의 가장 근본적인 작동 원리를 보여주는 창이다.
그림자에서 얼굴을 보거나, 구름에서 동물 형상을 발견하는 현상은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라 불리며,
이는 예측 부호화, 베이지안 추론, 자유 에너지 원리라는 세 가지 핵심 이론으로 설명된다.
이 세 원리는 마치 삼위일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이 통합되어 우리의 인지 세계를 형성한다.
예측 부호화는 뇌가 감각 입력을 처리하는 근본적인 방식을 설명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뇌는 수동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계에 대한 예측을 생성하는 능동적 해석기이다.
우리는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을 본다
이 말은 예측 부호화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한다.
우리는 어두운 방에 들어가 벽에 맺힌 흐릿한 그림자를 볼 때, 뇌는 즉시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가설을 생성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정보 흐름이 동시에 작동한다.
- 하향식 예측(top-down prediction): 고위 뇌 영역에서 생성된 "이것은 사람의 형상일 것이다"
- 상향식 예측 오차(bottom-up prediction error): 실제 감각 입력과 예측 사이의 불일치
예측 부호화가 작동하는 순간,
우리는 매우 적은 정보로도 전체 패턴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토스트에서 예수의 얼굴을 보는 현상이 대표적 예이다.
연구에 따르면, 실험 참가자들은 순수한 노이즈 이미지에서도 34%의 확률로 얼굴을 보았고, 38%의 확률로 글자를 보았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정신적 오류가 아니라 뇌의 정상적인 기능이다.
베이지안 추론은 불확실성 속에서 최적의 판단을 내리는 수학적 프레임워크이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우리 뇌는 기존 지식(사전 확률)과 새로운 감각 정보(가능도)를 결합하여 최적의 해석(사후 확률)을 도출한다.
가령 어두운 골목에서 흐릿한 형상을 발견할 때,
뇌는 즉시 "이것은 사람인가, 쓰레기통인가?"라는 확률적 계산을 시작한다.
이때 이전에 경험한 세계에 대한 지식(사전 확률)과 현재 감각 입력(가능도)을 종합하여 최종 판단에 도달한다.
이러한 베이지안 추론의 관점에서 볼 때,
파레이돌리아 현상은 문화적 경험이 강하게 반영된 사전 확률의 작용이다.
서구 문화권의 사람들이 toast에서 예수의 형상을 자주 발견하는 것은, 그들의 뇌가 이러한 종교적 이미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강한 사전 확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인 '버진 메리 그릴드 치즈' 사건은 이를 잘 보여준다. 2004년, 플로리다의 다이애나 두이저(Diana Duyser)는 10년 동안 보관해온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를 eBay에 경매로 내놓았다.
그녀는 샌드위치에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했고, 온라인 카지노 GoldenPalace.com이 28,000달러에 이를 구매했다.
세 번째 이론인 자유 에너지 원리는 앞선 두 이론을 통합하는 포괄적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뇌의 근본적인 목표는 '놀라움(surprise)' 또는 '예측 오차'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뇌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내부 모델 수정: 세계에 대한 내부 모델(예측)을 조정하여 현실과 일치시킨다.
적극적 추론(active inference): 행동을 통해 환경 자체를 변화시켜 예측과 일치하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흐릿한 모양의 잠재적 얼굴 형상을 보면,
우리는 머리를 기울이거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등의 행동을 취한다. 이는 입력 자체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로, 자유 에너지 원리에 따르면 '적극적 추론'에 해당한다.
이 세 가지 원리가 어떻게 함께 작동하여
파레이돌리아를 일으키는지 살펴보자.
- 감각 입력: 모호한 패턴(토스트의 그을린 자국)이 시각 피질에 입력된다.
- 베이지안 사전 확률 적용: 우리의 문화적 경험과 기억이 사전 확률을 형성한다. 종교적 이미지에 자주 노출된 사람은 "이것은 예수의 얼굴일 것이다"라는 사전 확률이 높아진다.
- 예측 생성: 전전두엽에서 하향식 예측 신호가 생성되어 시각 피질로 전달된다. "이 패턴은 얼굴처럼 보인다"라는 가설이 형성된다.
- 예측 오차 최소화: 실제 감각 입력과 예측 사이의 불일치(예측 오차)가 계산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 뇌의 방추상회 얼굴 영역(FFA)이 활성화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FFA는 실제 얼굴을 볼 때뿐만 아니라 얼굴 파레이돌리아가 발생할 때도 특이적으로 활성화된다.
- 자유 에너지 최소화: 예측 오차(자유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뇌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1) 내부 모델 수정: "이것은 정말 얼굴이다"라는 신념 강화
(2) 적극적 추론: 머리 기울이기, 더 가까이 다가가기 등 행동 유발
그 결과 우리는 토스트에서 예수의 얼굴을,
구름에서 동물의 형상을, 그리고 일상의 다양한 물체에서 얼굴과 유사한 패턴을 발견한다.
이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연구 결론을 잘 보여준다.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비정상적인’ 또는 ‘잘못된’을 뜻하는 ‘para(파라)’와 ‘이미지’ 또는 ‘형상’을 의미하는 ‘eidolon(에이돌론)’이 합쳐진 말로,
본래 존재하지 않는 의미나 형태를 무의미한 자극에서 인식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파레이돌리아는 단순한 오류나 환각이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성 속에서 빠르게 의미를 찾아내야 했던 인류의 진화적 적응의 결과이다.
어두운 숲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했을 때,
“그것이 포식자의 얼굴이다"라고 잘못 판단하더라도(거짓 양성)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레이돌리아 현상을 설명하는 세 가지 이론은 뇌가 불확실성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측 부호화는 뇌가 끊임없이 가설을 생성하고,
베이지안 추론은 불확실성 속에서 최적의 판단을 내리며, 자유 에너지 원리는 이 과정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방식을 보여준다.
다음번에 토스트에서 예수의 얼굴을 보거나,
구름에서 동물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인간 뇌의 놀라운 능력의 증거이기도 하다.
Friston, K. (2010). The free-energy principle: a unified brain theory? Nature Reviews Neuroscience, 11(2), 127-138.
Clark, A. (2013). Whatever next? Predictive brains, situated agents, and the future of cognitive science.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36(3), 18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