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장미의 이름, 살바토레, 푸코, 담론, 판옵티콘, 감시와 처벌
중세의 수도원은 단순한 기도와 명상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세계를 해석하고, 인간의 사고를 조직하며, 어떤 진리만을 ‘옳다’고 선언하는 거대한 기호의 공장, 즉 ‘진리 제조소’였다. 수도원의 벽 안에서는 오직 허락된 지식만이, 허락된 방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었다. 신은 하나이고, 진리는 하나이며, 그 진리를 말하는 언어도 하나여야 했다.
하지만 이 엄격한 세계 안에도 틈은 존재했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살바토레는 바로 그 틈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수도원이 만들어낸 ‘이성적 세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자였다.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가 마구 섞인,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말들을 웅얼거리며 돌아다니는 살바토레. 그는 수도원의 사람들이 갈고닦은 단정한 언어의 질서, 해석의 질서를 어지럽힌다.
에코는 이 살바토레를 단순한 ‘미치광이’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말한 것처럼, 이성이 자신을 세우기 위해 내쫓고 억압해야 했던 또 다른 얼굴이다. 살바토레는 수도원의 경계 너머, 이성이라는 성벽이 미처 가두지 못한 바깥의 세계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 바깥의 세계는 ‘진리’가 하나가 아님을, 말이 결코 하나의 의미만을 가질 수 없음을, 모든 질서가 결국은 언젠가 균열될 수 있음을 속삭인다.
살바토레의 언어는 바벨탑이 무너진 뒤 인간에게 남겨진 파편처럼 들린다. 단테가 지옥의 깊은 곳에서 만난 자들의 혼란스러운 외침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살바토레는 하나의 언어, 하나의 진리를 갈망하는 수도원의 꿈을 부수는 존재다. 그가 웅얼거릴 때마다, 수도원은 자신들의 세계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 장에서는 살바토레라는 인물을 통해,
- 어떻게 ‘정상적인 언어’가 만들어지고,
- 어떻게 ‘진리’가 규정되고,
- 그 과정에서 무엇이 버려지고 억압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살바토레는 단순히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수도원이라는, 나아가 인간 이성 전체가 세워 놓은 ‘질서’의 외부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다. 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어온 것 역시
누군가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통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어떤 말이 진실이 되는 데에도 ‘허가’가 필요하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허가는 누군가가 주는 것이라면?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1969)에서 지식을 단순한 진리의 축적이 아니라, 특정 시기와 맥락 속에서 무엇이 말해질 수 있으며, 누가 말할 수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담론(dispositif)의 체계라고 규정한다.
즉, 진실이란 그냥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어딘가에서, “이 말은 해도 된다”, “이건 하면 안 된다”를 결정하고, 그 결정 속에서 어떤 말은 빛을 보고, 어떤 말은 깜깜한 구석으로 쫓겨난다.
요약하면, 지식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권력의 구조와 얽힌 언어적 배치다.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한 ‘담론’은 단순히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이나 ‘대화’를 뜻하지 않는다.
담론이란, “어떤 사회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지를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룰과 힘의 체계”를 뜻한다. 담론은 말을 ‘허용’하거나 ‘억압’하면서 사회를 조직하고, 결국 권력과 지식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담론 = 어떤 말은 가능하게 만들고, 어떤 말은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의 룰.
살바토레는 이 담론의 바깥에서 소리치는 존재.
수도원은 '진리'를 독점적으로 해석하고 분배하는 권위 구조이며, 그 안에서 '올바른 언어', '정통 교리', '해석 가능한 의미'만이 담론 안으로 진입을 허용받는다.
즉, 수도원은 이런 허가의 공장이었다. 거기서는 오직 ‘정통 신학’만, ‘공식 해석’만, ‘허락된 언어’만이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모든 말은 무시되거나, 금지되거나, 때로는 이단으로 몰려 불태워졌다.
그런데 이 틀을 부수는 존재가 바로 살바토레였다. 살바토레의 언어는 바로 이 담론 체계의 경계를 넘나들거나 침범하거나 파괴다.
담론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권력의 메커니즘이며, 침묵 또한 말의 일부다.
– 푸코
살바토레는 말하지만 이해되지 않음으로써, 수도원 담론이 외면한 침묵의 기호를 생성한다.
그는 수도원이 인정하는 언어로 말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어에 스페인어를 뒤섞고, 라틴어에 독일어를 섞어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누구도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살바토레는 수도원의 ‘담론 체계’를 교란시킨다. 그는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누가 말할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하며”, “어떤 의미만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철저히 정한 규칙 위에 세워진 것임을 보여준다.
살바토레는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정확하게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이 억눌러버린 침묵, 감춰진 외침을 품고 있는 존재가 된다.
마치 수도원의 성스러운 성가 소리 뒤편에서, 누군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 푸코의 1969년 저서 『지식의 고고학』에서 그는 '담론형성체'(discursive formation)라는 개념을 통해 지식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제도화되는지 탐구한다. 담론형성체는 특정 시대와 사회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규칙 체계이다. 수도원은 중세 시대의 지배적 담론형성체 중 하나로, 성경해석, 신학논쟁, 기도문, 의례 등의 형태로 '말할 수 있는 것'을 엄격히 통제했다.
게다가 살바토레의 언어는 ‘의미’라는 것을 쉽게 붙잡을 수 없게 만든다. 라틴어 문장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수도원에서는 성경 구절 하나하나가 명확한 교훈이나 신비로운 진실로 읽혔지만, 살바토레의 말에서는 하나의 뚜렷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는 모든 언어가, 기호 하나하나가, 그저 약속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기호는 본질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끼리 정한 부호일 뿐이다”라고.
* 푸코는 『말과 사물』(1966)에서 16세기까지 서구 사상은 '유사성의 인식론'에 기반했다고 주장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의 창조물로써 서로 상응하는 유사성의 네트워크로 이해되었다.
이런 유사성의 원리는 특히 중세 수도원에서 '성서 해석학'의 핵심이었다. 문자적 의미(literal meaning)보다 알레고리적, 도덕적, 신비적 의미(allegorical, moral, anagogical meanings)를 중시하는 '사중 해석법'(quadriga)이 지배적이었다.
단테도 동일한 취지로 본인의 작품들을 이 4가지 기준의 알레고리로 읽으라고 했다.
살바토레의 언어는 이러한 유사성의 네트워크를 교란한다. 그의 혼종어는 단일한 의미로 환원되지 않으며, 어떤 명확한 기표-기의 관계도 설정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살바토레는 마치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한 '기호계(semiotic)’에 머무는 존재처럼 보인다. 기호계는 아직 질서 잡히지 않은, 감정과 리듬의 영역이다. 그는 언어를, 의미를, 정리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흘러넘친다.
■ 기호계(semiotic)란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제시한 ‘기호계(semiotic)'란, 언어가 논리적 문장으로 다듬어지기 전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감정과 리듬의 흐름을 말한다.
아기가 말을 배우기 전에 우는 소리, 리듬, 억양처럼, 아직 명확한 의미나 문법을 갖추지 않은 몸과 감정의 움직임 그 자체가 바로 기호계다.
기호계는 이성적으로 ‘정리된 언어’(= 상징계)로 다듬어지기 전에 우리 안에서 흐르는 생명력, 욕망, 무의식적인 에너지를 가리킨다. 그래서 기호계는 항상 언어의 바깥에서 언어를 흔들고, 질서를 어지럽힌다.
기호계(semiotic) = 말이 되기 전, 몸과 감정이 흘러나오는 원초적 리듬. 살바토레의 언어가 딱 이 느낌.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타자는, 우리가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살바토레는 바로 그런 타자다. 우리가 아무리 그의 말을 해석하려 해도, 그는 우리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우리 ‘진리 체계’의 빈틈을, 폭력을, 한계를 낱낱이 드러내면서.
살바토레는 결국 말한다. 아주 서툴게, 어눌하게, 조각조각 부서진 언어로. 그가 건네는 그 조각들은 수도원의 단정한 진리 세계에 금을 낸다.
너희가 믿고 있는 세계는,
그저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지도 몰라.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의 윤리학'에 따르면, 살바토레는 수도원이라는 '동일자'(the Same) 체계가 절대 온전히 이해하거나 동화시킬 수 없는 '타자'(the Other)이다. 그의 존재는 수도원의 담론 체계에 윤리적 균열을 일으키고, 체계 자체의 한계와 폭력성을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는 ‘감시’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CCTV, GPS, 인터넷 검색 기록, 모든 것이 우리를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 시작은 아주 오래전, 벽돌로 지어진 특별한 건물에서 비롯됐다.
18세기,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건축물을 고안했다. 그것은 감옥이었지만, 단순한 감옥이 아니었다.
가운데에 커다란 감시탑이 서 있다.
그리고 그 탑을 둘러싸고 둥글게 감방들이 배치된다.
감시자는 탑 안에 숨어서 수감자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수감자는 감시자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판옵티콘(Panopticon)의 어원:
- Pan- = 모든 것을 (그리스어 πᾶν)
- -opticon = 보다 (그리스어 ὀπτικός – 시각, 관찰)
즉, panopticon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구조", 혹은 "전시적 시선의 체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사람들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감시는 내면화된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스스로 감시하게 된다. 즉, 권력은 외부에서 강제하지 않고, 내부로 침투하여 자율 규율을 생성한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이 구조를 근대 권력의 본질로 읽어냈다. 폭력이나 강압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을 통해 인간을 길들이고 규율하는 방식. 판옵티콘은 감옥뿐 아니라 학교, 병원, 군대, 그리고 수도원의 모형이기도 했다.
『감시와 처벌』은 형벌제도의 변천사를 통해 권력이 어떻게 신체를 통제하고 규율화하는지 보여준다. 푸코에 따르면 중세의 공개 처형에서 근대의 교도소 시스템으로 변화한 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발전'이 아니라, 더 효율적이고 내면화된 권력 행사 방식의 발명이었다. 판옵티콘은 그 상징이다.
이건 우리 일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배우자에게 핸드폰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는가? 그러면 배우자가 언제든 내 핸드폰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감시가 내면화된다.
그럼 수도원은 어땠을까?
수도원은 모든 것을 규율했다. 기도하는 시간, 먹는 시간, 걷는 방식, 심지어 생각하는 방식까지. 수도사들은 누가 보는지 몰라도 항상 스스로를 통제해야 했다.
신이 보고 계신다.
형제들이 보고 있다.
감시 가능성 자체가 행동을 규율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중세판 판옵티콘이었다.
그런데 살바토레는?
그는 이 규율의 그물망을 피해 다닌다. 그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고, 그의 말은 해독할 수 없다. 그는 수도원이 짜 놓은 시간표를 따르지도 않고, 감시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살바토레는 수도원의 ‘전시적 시선’을 무력화시킨다. 그는 가둬질 수 없는 기표, 규율될 수 없는 몸짓, 규율이 내면화될 수 없는 자이다.
수도원의 규율 체계는 살바토레 앞에서 균열을 일으킨다. 그는 수도원의 ‘내면화된 감시 시스템’이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권력, 그 완벽해 보이는 눈에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일상생활의 실천』(1984)에서 수도원의 시간표, 공간 배치, 의례 등이 수도사들의 몸과 정신을 규율화하는 '전략(strategy)'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살바토레는 이러한 전략에 대항하는 '전술(tactic)'을 구사한다. 그의 이해불가능한 언어, 기괴한 몸짓, 예측불가능한 행동은 수도원의 규율 체계를 교란하고 그 한계를 드러낸다.
* 푸코의 '종속화'(assujettissement) 개념:
권력이 어떻게 주체를 형성하는 동시에 예속시키는지 설명하는 개념이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규율 체계 내에서 '신실한 수도사'라는 주체로 형성되지만, 살바토레는 이 종속화 과정이 실패한 예외적 사례이다.
그는 공동체의 규율을 내면화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수도원의 담론 질서가 성공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지점을 표시한다.
한국 남자들은 군대를 통해서 이 공동체 규율을 강제로 내면화시킨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군대를 면제받고 해외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들은 이러한 공동체 규율이 잘 내면화되지 않는다. 서구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탑재된 유학파들에게는 한국의 권위주의 공동체 규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 구조는 단지 수도원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병원에서.
우리는 ‘규칙’을 지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감시’를 스스로 내면화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푸코는 말한다.
모두가 스스로의 판옵티콘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수도원의 두터운 벽 안에 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규율의 방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디지털 기술과 스마트 기기를 매개로 훨씬 더 교묘하고 정교한 형태로 진화했다.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의 본질은 ‘감시’ 자체가 아니라, 감시의 내면화, 즉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개인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게 만든다는 메커니즘이다.
이제 이 구조는 감시탑이 아니라 내 손 안의 스마트폰, 클라우드 서버, 자기 계발 앱의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의 감시자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다. 대신 자유롭게, 즐겁게, 효율적으로 스스로를 관리하고 통제한다. 매일 나의 걸음 수, 구독자 수, 좋아요 수를 확인하고, 집중 시간을 측정하며, SNS에 자기 이미지를 조정하는 행위들 속에서 우리는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자신을 보이게 만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렇게 해서 감시는 외부 권력이 아닌 ‘자기 자신을 효율화하는 자유로운 주체’의 형식으로 전도된다.
살바토레는 이런 시대를 예감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언어를 정리하지 않고, 자신을 최적화하려 하지 않으며, 해독될 수 없고 예측 불가능하다. 수도원의 감시망에 잡히지 않듯, 오늘날의 데이터 추적 시스템에도 매끄럽게 호응하지 않는 존재. 그는 ‘기록될 수 없음’으로, ‘측정 불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살바토레는 디지털 판옵티콘 시대의 오류 메시지이며, 시스템이 이해하지 못하는 예외값이다.
디지털 기술이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깊숙이 침투할 때, 진짜 자유는 통제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측정될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살바토레는 모든 행동이 추적되고 모든 감정이 데이터화되는 이 시대에, “이해되지 않을 자유”, “기록되지 않을 권리”가 무엇인지를 묻는 존재로 새롭게 다가온다.
- 수도원 = 중세적 판옵티콘 (기도, 행동, 언어까지 감시하고 규율)
- 살바토레 = 이 감시 체계가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증거
- 디지털 시대의 판옵티콘 = 외부에 있던 판옵티콘의 내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