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이 나를 떠날 때
영포티란 말이 유행이라고 한다. 문자의 뜻만 두고 본다면 젊은 사십 대란 말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니 꽤 조소 섞인 말인 것 같아서 이제 막 사십 대에 접어든 일인으로서 기분이 썩 개운치 않다.
엊그제 옷장 안에 있던 청 셋업을 꺼내 입었다. 그 날 따라 헤어컬도 왠지 잘 살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이 꽤 괜찮아 보여서 외출 전 첫째에게 엄마 어때? 하고 물었더니, 첫째가 말했다. 오, 엄마 좀 젊어보여. 삼십 대 같아!
불과 몇 개월 전만해도 분명 삼십 대였는데, 사십 대에 접어들고 그 소릴 들으니 그만 기분이 좋아버렸지 뭔가. 예쁘단 소리 같아서.
나이에 맞게 살고 싶었다. 은발의 할머니들을 동경했고, 눈가의 주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수수한 중년이 워너비였다. 스무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냐는 지인의 질문에 아니라고, 차라리 괜찮은 쉰, 예순의 어른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나였다.
그런데 노화로 인한 변화를 거울 속에서 마주하며, 젊은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거리가 하루하루 더 멀어짐을 느끼며, 젊은 시절로까진 아니어도 오늘의 노화를 늦추고 싶은 마음이 실은 점점 커졌다. 상상했던 나이듦과 현실 속 나이듦의 괴리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이리라.
나이가 드니 할머니들의 머리가 왜 뽀글거리는지 알 것 같았다. 청순의 대명사인 긴 생머리도 나이가 드니 그 느낌이 아니었다. 생기 없고 초췌했다. 내츄럴 생기가 사라지는 나이라 인공 펌으로라도 생기 심폐소생술을 해야 했다. 언젠가 미용실에서 내가 위에서부터 웨이브 넣어달라고 하니 원장님이 의아해하셨는데, 내가 아이 엄마라는 걸 아시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다고 하셨다. 위에서부터 웨이브를 넣어달라는 주문이 젊은 사람답지 않았다고.
나는 올드포티다. 여전히 머리 꼭대기부터 펌을 하고, 추워지면 곧장 내복을 찾아 입는 사람. 영포티라고 언급되는 브랜드의 옷도 없다. 이건 그럴 재력이 없는 탓이겠지만. 그럴 재력이 있대도 '굳이'다.
몇 년 전 대학원에 다닐 때, 퇴근하고 대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캠퍼스를 거니는 대학생들이 그렇게나 풋풋하고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그 때 내가 나이 들었구나를 느꼈다.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는 사람들, 스탠드에 앉아 응원하는 사람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커플들, 책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과잠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웃음. 하나하나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들은 봄날에 새로 돋은 이파리처럼 푸르고 싱그러웠다. 나의 어릴 적도 그랬을까. 그랬겠지. 고등학생 때 화장한 친구들을 보면 선생님들이 그러셨다. 니들 나이 때는 맨 얼굴도 예쁠 때라고.
노화는 자연스러운 거지만, 그걸 내 몸으로 겪어내는 건 이성의 작동과는 또 다른 차원이라고 변명해본다. 사회가 만들어온 젊음에 대한 환상도 한 몫 하고 있다고도 변명해본다. 젊게 사는 방법은 알려 줘도 잘 나이드는 방법은 누구도 가르쳐 준 적 없다고도.
물론, 내 흉내를 내는 사람을 보는 일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치즈인더트랩의 손민수란 이름이 여태 회자되는 것만 봐도. 내가 속한 범주와 내가 아닌 범주를 구분 짓고 싶은 마음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영포티 신드롬이 아쉬운 것은 가진 쪽이 우위에 서서 잃어가는 쪽을 폄하하는 듯한 모양새기 때문이다.
나는 젊음을 잃어가는 내가 종종 가엽다. 하루라도 천천히 늙고 싶어서 사십 평생 안 사던 팩을 사다가 틈나는 대로 해보려고 시도하는 내가 안쓰럽기도 하다. 내게 젊음은 있을 땐 당연한 것 같다가 잃어가면서야 아 그 때 그게 선물이었구나 싶은 그런 거였다.
젊음은 필연 저문다. 누구나 나이가 들고 젊음과 멀어지며 마침내 젊음과 어울리지 않는 날이 온다. 그 때가 되면 나의 젊음은 나를 떠나 그 시절의 나와 닮은 이에게 찾아갈 것이다. 젊음은 빛나고 찬란하지만, 나이듦은 깊고 단단하다. 인생의 명도가 인생의 심도로 전환되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젊음은 어느 시기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지금 빛나는 당신이 조금만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주기를. 그 너그러움이 나중의 당신에게 너그러이 돌아올 것임을.
p.s. 깊어지는 길목에 선 당신이라면, 우리 함께 괜찮은 어른으로 깊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