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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슬기로울(까) 직업생활

자아가 쪼그라지다 못해 없어지겠어

by 웬디

직업은 자아 실현의 장이랬다, 분명.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나는 그렇게 배웠다. 당시 학생 신분이던 우리 모두가 직업을 갖기 전이니 그렇게나 공식적이고도 대대적인 농담이 가능했던 걸까.


직업을 갖고 직업인으로 살아오 동안을 갖는다는 것 자아 실현이라기보다 자아 소모 에 가깝지 않 자주 생각하게 었다.


돌아보면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서 모를 뿐인 일 앞에서 쓸데없이 작아졌고, 경험이 쌓이면 쉽게 가르마가 타질 일 앞에서 쓸데없이 긴 시간을 허비하느라 결국은 동동거리며 분주히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나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으니 때마다 나를 탓하고 미워하고 힐난하느라 바빴다.


사실 웬만큼은 알고 있어야 내가 뭘 모르는지 안다. 아무 것도 모르면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른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모르면 물어보라는 구원의 손길들이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뭘 질문해야 할지도 모른채 무지의 암흑 속에 갇혀버리고 만다는 걸.


돌아보면 업무 시간 내 삶과 분리된 시간 같았다. 오래(?) 전 태어난 내가 강산이 여러 번 바뀔 동안 나로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중이지만, 업무 시간라 불리우는 시간 동안 나는 내 삶의 주체가 아니었다. 어디서 빌려온 시간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느낌. 유를 느끼는 순간 줄에서 떨어져버리는 형벌을 받은 곡예사 마냥 그 시간 동안 나를 갈아넣어서 어떻게든 괴롭게 만들려고 애썼다. 화장실 가는 시간조차 아꼈다. 대여한 고귀한 시간에 작은 흠이라도 생길까 사소한 실수차 어마어마한 눈덩이가 되어 나를 짓렀다. 아보면 일 아닌 일들이지만 그 일들로 인해 내 자아는 수 십 번, 수 백 번씩이나 죽었다가 그 때마다 출동해준 소중한 사람들 덕분에 겨우 살아다.


살아지만 점점 작아지긴 했다. 어느 날엔 수화기 너머 (보이지 않는) 표정에 작아졌고, 어느 날엔 (미묘하거나 대놓고) 날선 언어에 작아졌고, 어느 날엔 애써도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훌륭한 동료 앞에서 작아졌고, 어느 날엔 가상의 시선 앞에서 작아졌고, 어느 날엔 아무 일 없어도 스스로 작아졌다. 심지어는 과거의 나 앞에서도 작아졌다. 작아지고 작아지다 언젠간 사라질 것 같은, 내가 금 딛고 선 배경에 삼켜져 묻혀버릴 것만 같은, 툭 하고 존재가 눈물이 되어 쏟아질 것 같은 숱한 날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침은 찾아왔고 출근은 했다.


물론 행복했다. 안 행복했다는 뜻은 아니다. 행복한 순간들이 몇 바구니, 아니 몇 트럭쯤 있었대도 그 점들을 선으로 꿰어온 것은 인내였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는 말의 포인트는 실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는 거였다. 결과와 상관 없이 인내는 썼다.


애썼다. 나도. 당신도.


살다 보면 어느 때엔가는 이 직장에서의 점을 선으로 꿰어가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때까지 나는 나와 당신을 응원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오면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웅크려 잠들었던 자유며 철없음이며 두 발 쭉 뻗고 잠 같은 것들을 깨워 한아름 꽃다발로 엮어 전하고 싶다. 여기까지 애써 걸어오느라 미처 몰랐겠지만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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