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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된다

미래에 아이들이 설 자리

by 웬디

언제부턴가 근로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는 다양한 직업인들의 목소리가 이전과는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집회나 시위, 파업 등의 방법으로 사업주와 세상에 전하는 목소리. 내가 살아가는 동시대 누군가가 겪고 있을 생계와 아주 밀접한 문제.


나는 아이들이 마냥 예뻤다. 교대 다닐 적엔 지나가는 아이에게 눈인사며 손인사를 건네다가 애들 엄마가 싫어할 거라고 핀잔을 듣곤 했다. 발령 받고 보니 그 예쁜 아이들이 우리 반에 있었다. 아직 초상권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던 그 시절 내 카톡 프사엔 늘 우리 반 아이들이 있었다.(물론 지금은 없다. 반 아이들, 집 아이들 모두 비공개) 동화 속 세상을 엿보는 듯한 느낌. 같은 세상에 살고 같은 인간으로 분류되지만, 어른과는 확실히 다른 존재였던 아이들. 아이들은 사랑스러움과 순수함으로 대변되는 인간계의 아주 특별하고도 고귀한 종족 같았다.


3월이 되어 새 아이들을 맞이하고 그 아이들과 이별하길 십 수년.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십 대였던 나는 삼십 대가 되었, 내 품을 떠난 아이들이 자랐고, 내 생각도 뒤를 라 자랐다.


둘째 해에 맡았던 6학년 아이들이 이제 성인이 되었겠다 싶었을 즈음이 되어서야 내가 사랑했던 작은 존재들이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됐다. 가만히 누워만 있던 아기가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듯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는 건 당연한 거였는데, 그게 당연한 줄을 몰랐다. 바보같은 얘기지만 내가 만났던 아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일 줄 알았었나보다.


그 즈음 아이들이 하나 둘 소식을 전해왔고 번호를 바꾸지 않은 아이들은 카톡에 사진이 올라왔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 아이들도 나와 같이 시간을 타고 흘러가고 있구나. 그러니 분명 그 후로도 아이들은 앞으로도 더 자라갈 거였다. 언젠가는 취업의 문을 두드리고, 어딘가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겠지. 생각이 흘러 여기까지 닿으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직업들이 다시 보였다. 매일 마주해서 너무나 익숙했던 '일하는 사람들'이 돌연 낯설고 생경하게 다가왔다. 본투비 평화주의자지만 시위, 농성, 파업의 소리도 궁금해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들의 요구가 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기업 경영에 관해선 완벽한 문외한이다. 어느 지점이 서로 윈윈이 되는 지점인지 모른다. 근로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과 기업의 비용 사이의 함수 관계를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언젠가 그 자리에 설지 모를 나의 아이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별 일 아닌 것 같아도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겐 큰 일인 게 있다. 한 번이면 견뎌볼 것 같은 일도 매일이면 견디기 힘든 일이 있다. 다른 사람 눈엔 안 보여도 그 안에 있음으로써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예전 같으면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럴까 했을지 모를 일들을 이제는 아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 그 자리에 설지도 모를 나의 아이들을 떠올리면.


바란다. 부디 아이들이 설 그 자리가 안전하길. 아이들의 목소리가 존중받길. 우리 아이들이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는 일터이길.


미래에 당도할 아이들을 위해 지금 어른들이 바꾸어줬으면 좋겠다. 서로를, 서로의 일을, 서로의 일터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봐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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