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일곱
나는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대부분 학원에 갔다. 나는 저학년 때는 동네 어귀에서 학원 안 다니는 친구들과 놀다가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집에서 티비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그림도 그렸다가 사부작사부작 무얼 만들거나 하면서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많아도 공부 한 번 하지 않았다. 더 신기한 건 엄마도 공부하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갔을 때 영어 알파벳을 처음 배웠다. 대문자는 오며 가며 어디선가 보았었지만, 소문자는 생 초면이었다. b와 d가 그렇게 헷갈렸다. 영어 선생님께서는 b를 배불뚝이로 연상하라고 하셨지만, 배불뚝이가 어느 방향으로 서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 내게는 썩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알파벳부터 이랬으니 수업 시간이라고 쉬웠을까. 설상가상 반편성 시험 결과를 알게 되었는데 반에서 5등인가 6등이었다. 충격이었다. 작은 초등학교에서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잘하는 사람으로 살았었는데, 여긴 다른 세상이구나 싶었다. 초등학생 때처럼 지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그러나, 나를 코치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스스로 공부를 시작할 만한 의지도 없어서 내 일상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진 않았다. 다만 시험 기간에는 계획을 세워 공부를 했다. 교과서를 읽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정리했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선생님 흉내를 내며 가상의 청중에게 강의를 했다. 벼락치기 공부로 코 앞의 시험만 대비하며 지냈다.
고등학교 입학할 적엔 소위 빡세게 공부 시킨다는 학교가 아니어서였는지 어쩌다 장학생이 되었다. 신입생 중 기숙사 선발 인원이 채 열 명도 안 되었는데, 운 좋게도 거기 들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아주 멀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엄마아빤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하셨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지내는 게 쉽지 않았다. 단체 생활이니 씻는 것도 용변보는 것도 편하지 않았다. 샤워 시설도 화장실 한 켠에 커튼만 쳐진 터라 웃풍이 셌다. 3월이면 아직 추울 때여서 오들오들 떨며 씻다가 단번에 감기에 걸렸다.
게다가 기숙사니 여러 가지 규율과 통제가 있었다. 6시면 기상해야 했고, 일어나자마자 자기가 맡은 청소 구역을 청소해야 했다. 눈을 반쯤 뜨고 반쯤은 감은 채로 청소를 끝내고 나면 바로 열람실 자기 책상에 앉아 아침 공부를 해야 했다. 자리에 앉으면 사감 선생님께도 돌아다니시며 출석 체크를 하시고 졸면 깨우셨다. 7시 50분까지 등교였었나, 7시 10분까지인가 아침 공부를 하고 줄 서서 씻고 옷 입고 기숙사 밖에 있던 식당으로 이동해 아침을 먹고 돌아와 양치를 하고 나면 교실에 빠듯하게 도착하곤 했다.
야간자율학습은 9시 50분까지였다. 열람실 출석 체크는 10시였다. 종료종이 치자마자 가방을 들쳐업고 기숙사로 이동해서 빠르게 환복해야 겨우 세이프였다. 그 때부터 12시까지는 공부 시간. 12시가 되어야 방에 들어가 잘 수 있었다. 기다렸던 12시가 되면 나는 간단히 세수를 하고 내 자리인 2층 침대에 등반하여 큐티책을 읽고 하루를 마치는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대부분은 그대로 골아 떨어졌지만, 어쩌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들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에 들었다.
태어나 바로 얼마 전까지 자유로이 시간을 보내던 애가 하루 아침에 이런 스케줄로 살게 되다니. 마음 둘 곳도, 편히 몸 둘 곳도 없었다. 혼자 있고 싶어도 늘 함께였고 숨고 싶어도 모든 게 오픈된 곳이었다. 그나마 내 침대가 2층이라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그 곳은 내 아지트이면서 방공호였다. 스트레스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게 됐다. 내가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를 자각하게 됐다. 이런 게 스트레스구나를 어렴풋이 알겠는 때였다. 그런데, 아뿔싸. 도무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건지를 모르겠었다. 취미라는 게 이럴 때를 위해 있는 거겠단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내게 운동은 또 다른 스트레스였으니. 해결은 커녕 하루하루 머리도 마음도 무거워만 갔다. 무척 보람될 스케줄로 가득 채워진 하루를 별 의미 없게 살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두 달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5월이 되었다. 열람실이 텅 비어있었던 걸 보면 아마도 주말이었던 것 같다. 빈 열람실로 터덜터덜 걸어가 가방을 내려놓으려는데, 내 책상 정면에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있었다.
웬디야, 우리 5월처럼 푸르르자.
옆 자리 선배 언니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푸르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 위로가 힘이 되었다. 어쩜 언니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그 메모의 잔상이 이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언니와는 꽤 나중까지도 연락을 했다. 그 메모 이야기도 했지만 언니는 잘 기억나지 않는 것 같았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아 허우적거리는 것만 같았던 열일곱의 이른 봄, 한없이 출렁거리던 그 시절, 언니의 메모는 그럼에도 내가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게 해주는 낭만이다. 작은 호의가 사람을 일으켜세우고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는 걸 보면, 어떻게 쓰일지 모를 작은 호의들을 나도 베풀며 살아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