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기의 존재 이유
복직하면서 식기세척기를 샀다. 설거지를 하면 등이 아픈 탓도 있었지만, 복직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설거지를 때마다 하긴 힘들 거란 생각이 결정적이었다. 잘한 결정이었다. 큰 도움을 받았다. 나 대신 설거지를 하는 식기세척기 소음을 들으며 좀 쉬고 있자면, 나를 위해 대신 일하는 게 사람이 아니라 기계여서 미안하지 않고 좋았다. 신통하고 기특했다.
몇 년 전부터 주변에서 자꾸 건조기가 있어야 한다고, 그게 있으면 삶의 질이 바뀐다고 했다. 남편이랑 몇 번쯤 이야기 나눠보았지만 빨래를 주로 담당하는 남편은 굳이 필요한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둔한 나와 달리 환경 변화를 잘 알아차리는 남편은 건조한 날엔 실내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빨래를 널었고, 습한 날이면 안방 베란다로 가져가 제습기를 켜고 빨래를 널었다. 그럼 꽤나 잘 말랐다. 그래서 사지 않기로 했다. 그 땐.
그런데, 유난히 장마가 길었던 올 여름 남편은 빨래가 꿉꿉했는지 건조기를 사자고 했다. 올 가을쯤 명절 수당을 받으면 살까 이야기 나누고 있었는데 계획보다 몇 달 빨리 사게 되었다. 바로 검색을 시작했다. 우리 집은 새 아파트가 아니라서 건조기 자리가 딱히 없다는 게 가장 처음 부딪힌 문제였다. 남편과 엄마는 통돌이 세탁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우리 집은 아마 오랫동안 통돌이 세탁기를 쓸 예정이기 때문에 드럼세탁기처럼 적층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 쇳덩어리를 집안에 놓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건조기는 안방 베란다에 들어가야만 했다. 유난히 좁고 긴 우리 안방 베란다에 들어가려면 건조기는 무조건 슬림해야 했다. 검색하면 순위 안에 드는 인기 건조기들은 줄줄이 자동 탈락됐다. 사이즈를 우선 순위에 두니 자연히 가격도 착해졌다. 적당한 가격에 좋은 평, 깔끔한 디자인을 갖춘 모델을 선택했다. 그리고 곧 우리 집에 입성했다. 맞춤처럼 딱 제자리에 들어맞았다. 사이즈를 재고 산 거니 안 맞을리 없지만서도 비워놓은 그 자리에 맞춤처럼 딱 들어가니 어찌나 신나던지.
올 여름의 끝에 건조기를 정말 잘 썼다. 꿉꿉한 냄새도 전혀나지 않았고 고슬고슬한 빨래 촉감도 좋았다. 남편도 나도 대만족이었다.
그 여름이 가고 드디어 가을이 왔다.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하고 한낮엔 해가 쨍쨍한 게 진짜 가을이다. 그 중에서도 어젠 정말 햇살이 예술이었다. 참고로, 우리 집은 저층이지만 햇살 맛집이다.
남편이 분리수거 쓰레기를 들고 막 나가려는데 빨래가 끝났다는 세탁기 알람이 들렸다. 남편은 양 손 가득 들고 나가며 나에게 빨래를 좀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오늘 빨래는 그냥 널면 되겠다고 했다.
-잉? 빨래를 넌다고요? 건조기에 안 넣고??
내 소리를 알아 들었는지 현관 쪽에서 남편 소리가 조그맣게 겨우 들린다.
-응, 오늘은 햇살 좋으니까!
쿵.
그렇게 남편은 나갔는데 잠시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무언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 정말 큰일이다. 어느 새 생각하는 일조차 통째로 그냥 기계에 넘겨버렸구나. 빨래가 잘 안 말라서 들인 기곈데 왜 이렇게 볕 좋은 날에도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왜 세탁기에서 나온 빨래는 당연히 건조기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정말 모르겠다. 아무 생각없었다. 건조기가 있으니 당연히 그런 줄만 알았다.
정신 차리자.
생각하자.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 여기면서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살지 않도록.
202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