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2
발레 배우는 엄마, 발레 잘 못하는 엄마
여러가지 이유로 운동이 필요했다. 고상한 이유로는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현실적인 이유로는 내 몸을 방치한 결과로 온몸 여기저기가 다 아파서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가족이 함께 할 운동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요즘 남편은 골프 연습에 한창이다. 성실함이 몸에 밴 남편은 원래 뭐든 시작하면 열심히, 그리고 오래, 규칙적으로, 꾸준히 한다. 헬스도 그랬고 수영도 그랬다. 골프를 시작하고도 역시 그랬다. 일주일에 2번이나 많으면 3번쯤은 퇴근하고도 연습하러 간다. 집에 있는 동안도 동영상을 찾아보고, 자기 연습 영상도 보며 자세를 교정하곤 한다.
나중에 나이 들었을 때 취미생활을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골프는 패쓰다. 골프는 스윙할 때 큰 힘이 필요하고 한 번 시작하면 오랜 시간 야외에 있어야 하는 스포츠라서 나와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때 어지럼증으로 병원에 갔을 때 의사선생님께서 나에게 적합하지 않은 운동들을 알려주셨었는데 그 첫째가 골프였기도 하고.
아이들이 방과후에서 탁구를 배우고 있어서 탁구를 다같이 치면 좋을 것 같았다. 마침 집 근처에서 탁구장을 보았던 것 같아서 검색해보았다. 탁구장, 탁구클럽, 검색어를 바꿔가며 검색해보아도 우리 집 근처에는 아무 것도 뜨지 않았다. 문을 닫았나.
그나마 걸어서도 갈 만한 곳을 찾아서 그 이튿날 직접 걸어가보았다. 나의 적극성은 아주 간헐적으로 발휘되는데 가족 운동을 찾아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한참을 뚜벅뚜벅 걸어 탁구장에 도착했다. 이 정도 거리면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탁구장으로 올라갔다. 입구에 신발장이 있었고, 그 위에 있는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이용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탁구장은 주로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비회원이 이용시에는 이러이러한 것을 주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비회원의 신발을 보관하는 곳이 따로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도난, 분실 사고 때문에 그렇겠지.)
내 발걸음이 멈췄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쓸 데 없이 언어의 온도에 민감한 나는 그 행간에서 내가 이방인임이 읽혔다. 가족 운동을 한다고 해서 회원이 될 생각은 없었다. 가족 운동으로 탁구를 택한다면 남편과 함께일 거였고, 남편과 함께 정기적으로 오려면 우리 가족의 패밀리 데이인 금요일이 좋았다. 남편은 탁구를 꽤 칠 줄 알았고 아이들도 이미 방과후학교에서 탁구를 배우고 있으니 정기적으로 와서 수련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나만 따로 와서 배울 열심까지는 없었다. 나는 그저 가족이 함께 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그 전 단계로 알아보러 왔을 뿐이었다. 나는 못해도 되고(아이들에게는 오히려 그래야 좋고) 그저 4인을 채우기 위한 멤버라고 생각했다.
탁구장을 이용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의 생리를 몰랐다. 그런데 그 안내문을 보고 나니 알 것 같았다. 가족 같은 분들 사이에서 낯선 사람으로 지낼 시간이 그려졌다. 나에게는 새로이 가족 같은 관계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시 '내향인 웬디'로 돌아가야 하나) 그렇다고 갈 때마다 이방인인 불편한 느낌을 견디고 싶지도 않았다. 탁구장에 가서 여쭤볼 것들을 여러 번 시뮬레이션 해왔고 코앞에 탁구장 입구가 있었지만, 아침부터 더운 여름날 이만큼을 땀나게 걸어왔지만, 나는 되돌아 나왔다. 행여나 누가 나와서 어떻게 오셨냐고 물을까봐 괜히 서둘러서, 조용히, 후다닥.
다시 걸으면서 마음이 허탈했다. 또 한 번 나의 민낯을 마주한 것 같아서 화도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으며 다시 생각해봐도 그 마음을 극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건강을 위해 얼마 전 만보기 어플을 설치했던 터라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동네를 빙 둘러 가기로 했다. 머릿속 네비게이션을 켜고 집까지 가는 큰 원을 그렸다. 그 원을 따라 걸었더니, 이내 낯선 동네에 도착했다. 눈으로는 익숙하지만 발로는 낯선 동네에.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생각이 났다. 여기 어디에 발레 학원이 있었는데... 눈을 들어 휘리릭 살펴보니 저 멀리 건물에 발레학원 간판이 보였다. 이미 탁구장에 들어가려고 마음 먹고 왔던 터라 사용하지 않은 용기가 남아있었나 보다. 일단 상담을 받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발레 학원에 무작정 들어갔다.
입구에서 문을 빼꼼 여니 발레복을 입은 분이 잠시 당황한 듯 하더니 인사를 건넸다. 조용한 학원에 혼자 계신 것을 보니 선생님 같았다. 상담을 받으러 왔다고 이야기를 하니, 오전 수업이 끝나서 막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시간을 잘 맞춰오셨다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지나친 환대도 아니고 사무적이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가 괜찮게 느껴졌다. 아이들을 보내고 싶은데 아직 상의 없이 내가 먼저 상담을 받으러 왔고, 예쁜 걸 좋아하는 둘째는 하겠다고 할 것 같지만 첫째는 설득의 과정이 남아있다고 운을 떼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첫째도 발레를 배우고 싶어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그 때는 바쁘단 핑계로(학교 일이 훨씬 더 숭고하다고 믿었다.) 신경써서 그 흥미를 연결시켜 주지 못했다. 돌아보니 아쉬웠다. 그 이야기도 했다. 아이들 수업 시간과 수강료 등 학원 상담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전해들었다. 그리고 내게는 본론과도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아이들 수업 시간과 같은 시간 대에 성인반 수업도 있는지. 몰랐는데, 학원은 선생님 혼자 운영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몸이 하나라 같은 시간에 두 개의 반은 운영 자체가 불가하다고. 가족 운동은 틀렸나 보다 혼자서 생각하던 때에 선생님이 말을 더 이어나가셨다. 몇 년 전부터 건강 때문에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초보 단계인 초등반 수강을 희망하시던 분이 계셨다고 했다. 그런 경험이 없어서 몇 차례나 고사하시다가 바로 다음 수업 때부터 참여해보시기로 하셨다고. 혹시 그렇게라도 참여를 원하시면 가능은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세상에나! 더 좋았다. 나도 함께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면 첫째 설득이 좀 더 수월할 것 같았다. 시간을 내주신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학원을 빠져나왔다. 왠지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은 설렘과 이 일을 수행해낸 뿌듯함이 엉켜서 그냥 집으로 가지 못하고 근처 카페에 들러 시원한 음료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내 어릴 적 첫번째 꿈은 발레리나였다. 티비를 보다가 우연히 발레 공연 홍보 영상(몇 월 며칠부터 며칠까지 어디에서 공연을 하니 많이 보러 오라는)을 봤던 그 순간이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이 난다. 그 영상 속 발레리나가 너무 예뻐보여서 그 이후로 몇 년간 내 꿈은 발레리나였다. 하지만 발레와 연이 닿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그 꿈은 나의 역사 속 한 페이지가 되었다. 다리를 일자 비슷하게 벌리고서 나름 유연하다고 자부했던 그 때와 달리 내 몸은 세월을 지나며 무척 뻣뻣해졌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분위기가 안정 단계로 들어설 즈음 조심히 운을 뗐다. 엄마가 오늘 발레학원에 가서 상담을 받고 왔는데 너무 좋았다고. 우리 셋이 같이 해보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예상대로 둘째는 바로 좋다고 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발레 동작을 직접 보여주었다. 팔을 둥그렇게 하고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가볍게 점프했다. 첫째는 듣자마자, 싫어! 비장의 무기를 꺼낼 차례다. 엄마랑 같이 수업 들을 수 있대. 초등학생이랑 어른이랑 같은 공간에서 무얼 배울 기회가 많지 않아. 엄마는 너희들이랑 같이 한 공간에서 배우면 너무 좋을 것 같아. 같이 해보자. 그러자 첫째가 말했다. 진짜 같이야? 옆에서 말고 다른 데서 말고 진짜 옆에서 같이 하는 거야? 응, 맞아!
비장의 무기는 첫째에게 나름 어필이 되었다. 낯선 걸 두려워하는 첫째를 위해 직접 한 번 보러 갔다가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첫째와 비슷한 성향의 내가 거부감 없이 느꼈던 소담하고 깔끔한 공간과 선생님의 적당한 온도라면 첫째도 긴장을 조금 늦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께 연락드려 양해를 구하고 수업 시작 시간 즈음하여 아이들과 함께 학원에 방문했다. 거기서 둘째는 학교 친구를 만나서 반가워했고 첫째는 자기 또래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인생이란 게 그런 건지 안 그래도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좋아할 거리가 또 하나 생겼고, 안 그래도 하기 싫은 아이에게는 싫은 이유가 하나 더 얹어졌다. 히지만 나는 기세를 잃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발레 예찬(아니 발레 학원 예찬)을 펼쳤다. 레슨실이 하나인 소담한 공간이라 엄마는 정말 좋더라, 선생님이 친절하고 따뜻하셔서 선생님께 배우면 정말 좋겠더라, 입구에 있는 발레복 너무 예쁘지 않았니, 네가 발레복 입으면 정말 예쁘겠더라 등등.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음 주에 발레 학원에 등록했다.
나는 돌고 돌아 삼십 여 년 만에 발레를 배우게 되었다. 사실 발레는 배운다는 말이 무색하게 따라할 수 있는 동작이 몇 없다. 명실상부 우리 반의 꼴찌다. 다 되는 게 나만 안 되고 나만 헤맨다. 그래도 좋다. 모든 아이에게 희망이 될 수 있어서. 심리적 완충재가 될 수 있어서. 그리고 비록 남편은 따로라서 완전체는 아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나름의 가족 운동(?)이 생겨서.
엄마인 나는 아이들과 나이 차이가 삼십 년 쯤 난다. 언젠가 첫째 아이에게 엄마는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니 책을 많이 읽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했다. 첫째 아이의 말은 자기 자신이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잘하는가.
그래서 나는 내 아이를 위해 '잘'하는 엄마의 자리를 내려놓고 다른 이름을 얻고 싶다. 요리를 못하지만 하고, 발레를 못하지만 열심히 배우는 사람. 내 삶이 아이에게 디딜 땅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네가 돌아볼 때 '맞아, 엄마도 그랬으니까'라고 생각하며 딛고 일어설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