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박사님은 죄가 없다

판단은 정확하게, 적용은 신중하게

by 웬디

다르다. 사람은 다 다르다. 나랑 똑 닮아서 깜짝 깜짝 놀라는 내 딸마저 나와 다르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그러니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지문을 등록하고, 휴대 전화를 열 때 얼굴 인식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 이렇다면,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군상으로 보고 처리하려는 모든 시도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학교가 예전 같지 않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사회가 변하듯 학교도 변하겠지만,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만큼 그 변화는 사회의 변화에 비해 빠르고 분명한 것 같다. 여 년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연령대의 아이들을 만나는 일을 하다보니 몇 가지 변수가 자연히 통제되고,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미리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해당되는 유형의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정도다.


전보다 많은 학생들이 기본생활습관을 수행하지 못한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 사람을 만나면 인사하는 일, 자기 물건을 관리하고 정리하는 일,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때 그 말이 끝날 때까지 자기 말을 참는 일.

그리고 붙여 누군가의 기쁨을 함께 축하해주는 일나 승부에서 졌을 때 승복하는 일지도.


몇몇 보호자님들은 아이를 제 나이에 맞게 떠나보내지 못한다. 알겠지만 아이가 막 돌 지날 무렵 엄마들은 척 바쁘다. 깐 한눈 판 사이 아기가 뒤로 쿵 넘어갈까봐 아기 등 뒤를 졸졸 따라다느라. 그러나 두 살쯤이 되면 여유가 좀 생긴다. 때부터 아이는 좀처럼 뒤로 넘어지는 일이 없고, 혼자서 자유롭게 서고 걷고 심지어 뛰기까지 한다. 아이는 분명 충분히 자라 학교에 입학했지만 아직 그 아기 뒤 서있는 보호자님들이 더러 계시다. 일상에서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작은 갈등으로부터도 아이를 완벽히 보호하고자 한다. 안타깝게도 아이는 학교라는 사회에 와서 채 회를 배우지 못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요즘의 학교는 '아동 학대'라는 거대한 프레임에 갇혀 위축되어 가고 있다. 슬프게도, 제대로 가르치고자 하면 큰일날 수도 있다는 말이 통용되는 시대다. 아이나 부모의 기분이 상하면 교사의 말과 행동을 학대 행위라고 규정하는 일들이 늘어난다. '기분상해죄'라는 웃픈 말이 회자된다. 웃고 넘겨야 할 말이건만 왜인지 실재하는 죄목처럼 느껴진다.


학교는 권위를 잃었고 통제할 힘도 잃었다. 경계를 잃은 아이들은 자기 힘의 한계를 알 길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힘을 폭발시킨다. 안타깝다. 힘이란 본디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때에야 진정으로 의미가 있을 것임에도.


최근 들어 몇몇 미디어를 통해 통제 불가능한-마치 시한폭탄처럼 폭발하는 공격성을 지닌 아이들을 보고서야 학교 밖 어른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었다. 학교 안에서는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관찰되어 왔지만. 보지 않고 깨닫는 건 어려운법이니까.


꽤 심각하다고 느끼는 문제 앞에서 사람들은 원인을 찾으려 노력했던 것 같다. 몇몇 프로그램에서 이러한 아이들을 다루기 시작한지 꽤 지난 시점에, 나는 비슷한 시기 여러 경로의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결론을 들었다. 오은영 박사님이 문제라고. 마음을 읽어주라고 그렇게 하더니만 결국 이 사달이 났다고. 그럴까?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육아 정보에는 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육아 서적이나 방송 등을 통해 전문가가 정보를 전달하지만, 어디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대체로 비전문가(부모 등)에 의해 결정된다. 주고 받은 정보가 정확한 사실이어도 약 잘못 적용다면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 다.

나는 실제로 이런 일이 꽤 많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십 여 년 아이들과 보호자님들을 만나오면서 각 보호자님의 기준이 주관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상담을 할 때도, 떤 일로 인해 연락을 드렸을 때도. 특히 1,4학년 때 실시하는 정서행동선별검사에서는 보호자님들의 기준 정면으로 충돌곤 했다. 학교에서 충분히 잘 지내고 있는 아이의 보호자님이 은 기준으로 은 점수를 주고, 이 아이는 좀 전문적인 도움 받아보면 좋겠다 싶은 아이의 보호자님은 오히려 낮은 기준으로 후한 점수를 주 경우가 그랬다.


그 나이에 그럴 수도 있는 잘못을 어쩌다 저지른 아이의 보호자님이 아이를 호되게 나무라시고, 행동이 도에 지나쳐 엄격한 지도가 필요한 아이의 보호자님은 도리어 애들이 크면서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별 일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시는 경우도 있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셔야 하는 경우인데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시거나, 하나의 에피소드로 참고하셔도 될 일을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시는 경우. 아주 다른 사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기준을 잘못 적용했다는 점에선 통하는 점이 있다. 한 사람의 교사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례만 해도 손에 꽤 꼽히는데, 지역을 넓한다면 얼마나 많을까.


나는 스물 아홉에 첫 아이를 낳았다. 2010년 대 초. 아주 먼 옛날도 아닌데도, 육아 정보가 요즘처럼 흔하진 않았다. 친한 친구들 중엔 제일 먼저 결혼한 터라 육아에 대해 귀띔해주는 이가 없었다. 삐뽀삐뽀 소아과 책을 교과서 삼고 여러 육아서적을 참고서 삼아 아이를 키웠다. 십 수 년이 흐른 지금은 육아 정보가 지천에 차고 넘친다. 책은 물론이고, 티비, 유튜브 등 경로도 다양하다. 혹 믿지 못할 내용이 많은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은 유명한 전문가 분들을 모시거나 유명 육아서의 저자를 모셔서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기에 내용도 꽤 신빙성 있다.


많은 아동심리 전문가들은 아이의 마음은 수용하되 행동은 통제해야 함을 이야기해왔다. 아이들의 감정에 귀기울여주지 않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던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에 이제 막 부모가 된 세대는 자신이 자녀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감정을 수용하는 데 더 방점을 두었을 것이다. 그릇된 일을 옳게 수정하려는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사이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육아 정보엔 감정 수용만 남고 행동 통제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어찌나 그랬구나 라는 말만 반복했었는지 젠가부터는 아이 말에 그랬구나 하고 반응을 하면 아이들조차 '우리 엄마 또 그러네' 한다는 우스개 말도 들었다. 공감의 대표 언어라고 할 만한 그랬구나가 어느새 비웃음의 대상이 된 것 같아 씁쓸했다. 전문가의 입에서 시작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달 과정의 편집이든 수용 과정에서의 편집이든 어딘가에서 각색이 일어났다.


오은영 박사님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고 계실 것이다.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 대상에 알맞은 방법으로 목표한 결과에 이르도록 여러 시도를 하실 것이다. 혹자는 작 몇 분 만나는 데 너무 과한 비용을 지불하는 게 아니냐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실제 비용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으며 적정 비용에 대한 생각이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비용은 논외로 하더라도, 시간에 대해서는 꼭 이야기하고 싶다. 혹 실제 상담 시간이 '고작 몇 분'이더라도 그 아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그 이상 상당한 시간이 들었을 것이라고. 내 눈 앞에 벌어지는 시간만 계수하면 안 된다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시간 동안 진정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을 수 있다. 육아에서 관찰과 파악은 정말 중요한 요소지만 눈에 보이는 역동이 없어서 간과되기 쉬운 듯하다.


아이를 잘 성장하도록 돕고 싶은 건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내 아이를 정확히 는 것이 튼튼한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다르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모든 아이 또한 다 다르다. 따라서 옆집 아이의 성공담을 내 아이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고, 첫 아이에게 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다 괜한 둘째를 잡을 필요도 없다. 각각의 아이를 가만 들여다보고 알고자 애쓰는 자세가 우선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 아이를 위한 진정한 필요가 보이게 될 것이다.


상담을 공부하며 알게 된 몇 가지 인상 깊었던 말 중 이런 말이 있다. 알지 못함의 자세. 상담자가 내담자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거나 단정하지 않고, 진정한 호기심과 열린 마음으로 내담자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부모는 분명 아이보다 인생을 더 오래 살았으며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아이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아이에 대해 관심을 갖되 아이의 일생 동안 알지 못함의 자세로 함께 걸어가는 존재여야 하는 것 같다. 오늘의 아이는 어제와 비슷하겠지만 또 다를 수 있으니.


바쁘다, 아프다, 피곤하다 여러 핑계로 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우리 집 아이들에 대한 나의 앎을 초기화하고, 오늘 저녁엔 알지 못함의 자세로 아이들을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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