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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웬디 Oct 18. 2024

뿌듯함으로 산다

네모와의 동행

내 다이어리에는 네모가 즐비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나면 곧장 다이어리를 열고 네모 하나를 그리고 그 옆에 해야 할 일을 간략히 적다. 그 일을 해내면 이미 그려둔 네모 안에 체크 표시를 한다. 그 날의 모든 네모가 모두 체크되는 일은 별로 없지만서도 벌써 수년째 나는 그렇게 하루를 산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빈 교실에 남아서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일을 해도-집에 방치된 아이들에게서 엄마를 이미 몇 시간이나 빼앗았으면서도-아직 텅텅 빈 네모들을 뒤로 하고 퇴근하는 날에는 한숨이 발자국마다 뚝뚝 떨어졌다. 텅빈 네모가 만들어 낸 그 날의 한숨 지친 발걸음을 더 무게 했다. 내일은 또 내일의 네모들이 쏟아질텐데 아직 남은 네모들까지 유예되어 도착할 내일이 어느 때고 아득했다.


럴 때마다  네모와의 동행을 그만하리라고 수없는 다짐을 하고 또 했지만 나는 여지껏 매일 새로운 네모를 그리는 중이다. 휴직 중인 요즘도 말이다.


휴직하고 나니 참  없다. 쓰레기 버리기, 거울 닦기, 치과 예약하기, 케찹 구입하기, 첫째 하교하면 ○○○ 물어보기 같은 사소하기 그지 없는 것들이다. 이어리도 없는 직자는 오늘목록을 다이어리 대신 화이트보드에 적어 거실 한 켠에 둔다. 며 가며 봐야 하나라도 더 한다.


어제 날이 유난히 좋았다. 화이트보드 안 네모 옆에 적힌 '쓰레기 버리기'를 지워볼 요량으로 분리 배출할 쓰레기를 잔뜩 들고 집을 나섰다. 참, 이게 뭐라고 분리수거장에 가는 길이 뿌듯하다. 미션을 수행하는 히어로가 된 것 같은 느낌.


돌아와 네모에 체크 표시다. 슴에 한 성취감이 인다. 흰 눈이 소복 쌓인 들판에 내 발자국을 처음 찍을 때의 느낌 같기도 하고 마지막 퍼즐 조각 하나를 맞춰 완성했을 때의 느낌 같기도 .

 

일을 할 때는 미처 몰랐는데 휴직하고 네모에 달린 내용이 이토록 소박해지니 알겠다. 모의 소용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해냈다는 뿌듯함에 있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빈 네모 말고 찬 네모에 집중했을텐데.


티도 나지 않는 집안일과 육아로 그 날이 그 날 같은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네모가 주는 뿌듯함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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