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는 즐겁다. 어떤 의미에선 해갈의 느낌이랄까. 답답했던 부분을 어떤 물건이 해결해 줄 때 개운함이 느껴진다. 그 영역이 한 때는 육아용품이었고, 한 때는 인테리어 용품이었으며, 한 때는 책이었고, 한 때는 사무용품이었다. 이건 이래서 필요하고 저건 저래서 필요하다고 내가 가진 비슷한 물건의 필요를 다 설명할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스텐 냄비 하나를 거의 열흘째 고르는 중이다.
엄마가 국이나 찌개를 끓여서 우리 집에 보낸 후로 그냥 우리 집에 정착해버린 냄비 두 개가 있다. 기존에 쓰던 코팅 냄비가 벗겨져서 버렸을 즈음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준 적이 없으나 꽤나 오랫동안 내가 주인처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손이 큰 엄마와 달리 나는 한 끼 분량의(기껏해야 두 끼나 될 정도) 국이나 찌개를 준비하기 때문에 냄비가 너무 컸다. 하나는 그럭저럭 쓸 만 한데, 두 개 중 더 큰 사이즈의 냄비에 무언가를 할라치면 약간의 과장을 보태 바닥이 찰랑찰랑할 정도였다.
내게는 한 끼 분량의 국을 끓일 작은 냄비가 필요했다(내가 잠시 주인인 척 했던 두 냄비도 원래 주인을 찾아가야 하니). 그래서 검색을 시작했다. 안전한 스텐 제품이었으면 좋겠고, 디자인은 내 눈을 충족시켜야 하고, 사이즈가 적당해야 했다. 교집합을 찾자면 얼마 되지 않는데, 그 몇 가지를 두고 하룻 밤 고민하다 자고, 다음 날 밤도 또 그러고, 그 다음 날 밤도 또 그러는 하루하루가 반복됐다. 휴, 이게 무슨 비효율적인 고민인지. 예전 같으면 그냥 사고 이거 아닌 것 같으면 다른 것도 또 샀을 나였다. 이 냄비는 국용, 저 냄비는 찜용처럼 각각의 용도를 붙여서.
그런데 이제는 살림살이를 늘리지 않고 싶으니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멀티 툴이 필요했다. 여러 개를 사려면 각각의 살림살이가 한 가지 기능에 충실하면 됐지만, 한 가지를 사려니 그 하나가 여러 가지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부피가 크거나 무겁거나(나이가 드니 제품의 무게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내 손목은 소중하니까) 비싸거나 전기를 이용해야 하는 것은 싫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고민에 고민이 더해진다. 사용할 때 손목이 아프진 않을까, 이런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을까, 보관할 장소는 적당한가, 내가 하는 음식의 양을 조리하기에 크기는 적당한가, 끓어넘칠 것을 감안하여 약간의 여유는 있는가, 휴직자의 지갑 사정을 고려할 때 가격은 적당한가, 꺼내두었을 때 미관을 해치진 않는가, 그 외에도 그 날 그 날 내 머릿 속을 스쳐간 갖가지 기준들이 더 있었다. 예전 같으면 고민하는 시간이 더 아깝다고 그냥 여러 개를 샀을 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통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은 비효율적인 고민의 시간 속에서 내 내면에는 뿌듯함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간소한 삶을 위해 이토록 고민하다니! 대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효율쯤은 갖다 붙일 게 아니었다. 책에서 보았던-까다롭게 물건을 고르고 소중히 사용하는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사용하기도 전이지만, 이미.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까다롭게 물건을 고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소중한 내 공간에 들일 물건은 까다로운 기준으로 고르고 골라 엄선된 물건만 들이고 싶다. 쉽게 들어왔다 쉽게 버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아니면 원래 그런 것을 여태 모르고 살았는지-요즘은 빈 공간이 아름답다. 빈 공간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알았으면 그냥 텅 빈 집에 살 걸. 어쨌든 이미 우리 집은 그렇지 않으니 작은 공간이라도 빈 공간을 만들어보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려면 정리로는 충분치 않고 그 공간에 원래 있었던 물건을 비워야 하는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는데, 나와 가족의 필요와 욕구를 조합한 심사숙고 끝에 선별하여 남길 것은 남기고 비울 것은 비운다. 사실 '비움'이라는 괜찮은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물건을 들이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까다로웠다면 하지 않아도 될 일 같아 사뭇 아쉽다.
사실 이 글을 적어 내려가는 며칠 사이에도 나는 또 물건을 샀다. 새 스텐 냄비를 포함하여. 하지만, 예전보다는 확실히 더 고민하고 더 까다롭게 들였다. 한참을 고민해도 결국은 사고 만 나를 보니 소비의 즐거움을 단 번에 끊어내지는 못할 사람인 듯하다. 그러나, 간소한 삶의 욕망과 소비의 욕망을 왔다갔다 줄타기를 하는 와중에도 내 지향점이 간소한 삶을 향해 한 발 더 내딛게 되었다는 것은 느낀다. 그렇다면, 완성형 캐릭터까지는 못되어도 '까다롭게 물건을 고르고 소중히 사용하는 멋진 사람'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걸어가는 성장형 캐락터정도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보려고 한다. 일단은 아직 못다 한 비움부터 조금 더 해낸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