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로즈, <평균의 종말>
모든 아이가 자기답게
이제 31개월인 둘째는 평균보다 작고 왜소하다. 그래서 걱정이다. 머리 둘레는 평균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또 걱정이다. 생후 71개월까지의 유아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영유아 건강검진표에는 키, 몸무게, 머리 둘레 세 항목이 표시된다. 이 세 항목이 모두 50이 나오는 아이는 몇이나 될까? 아니, 있을까? 그 아이 엄마는 아무 걱정이 없을까?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이런 것들이 궁금하지 않았다. 평균은 이토록 당연한 것이었구나.
나는 꽤 높은 자존감을 갖고 살아왔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관심받는 아이였다. 냉정히 돌아보면 공부 잘하는 아이라서 그랬다. 그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을 보았고, 시험에 여러 번 통과하며 어른이 되었다. 마지막 치른 시험이 임용고사였고, 그 시험에 통과하여 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교사로 살면서 마주한 나는 어릴 때 내가 알던 그 아이와 달랐다. 이상하리만큼 나는 못하는 것들이 많았고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정말 이상했다. 그런데 나는 왜 그토록 인정받으며 살아왔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평균의 ‘덕’을 보며 살았던 게 아닐까. 나라는 사람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전통적인 기준, 곧 시험에 의해 선발되기 쉬운 지능을 가졌던 것 같다. 언어를 이해하고, 암기하고, 서술하고. 나는 위기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지만, 전통적인 기준에서 이런 것들은 평가 요소가 아니었다. 위기 대처 능력이 우수하지만 언어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과 언어 이해력이 우수하지만 위기 대처 능력이 부족한 사람 사이엔 절대적인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이지만, 전통적인 기준 안에서 나는 늘 우위에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돌아보니 그랬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도 그게 이상하지 않았던 게 사무치게 무섭다.
이 책의 도입은 신선했다. 1940년대 말, 미국에서 전투기 추락이 잦아져 큰 문제로 떠올랐을 때 초반엔 조종사 과실로 사건을 종결하곤 했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조종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고 기계의 오작동과 결함도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없었다. 그러자 이 때부터 사람들은 조종석의 설계로 관심을 돌렸다. 전투기가 만들어졌을 시점의 조종사와 현재 조종사들은 신체 치수에 변화가 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시작되었고, 조사 시점의 조종사들을 대상으로 치수를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조종석을 적합하게 설계한다면 추락 사고가 줄어들 것이라는 합리적인 믿음이었다. 여기까지 읽고 나는 감탄했다. 어떤 규격에 사람을 맞추는 게 아니라 사람에 맞추어 규격을 바꾸는 일은 ‘평균의 종말’이라는 제목과 그럴듯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글의 초점은 나의 생각을 빗겨갔다.
모두가 동의하고 기대하는 이 믿음에 대니얼스라는 중위가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는 평균치에 드는 조종사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궁금했다. 그래서 이미 측정된 조종사들의 치수 중 조종석 설계와 연관이 높다고 판단되는 10개 항목의 치수에 대해 평균 범위(30%)를 산출하고, 10개 항목 전체에서 평균 범위에 드는 조종사의 수를 세어보았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단 한 명도 없었다. 다시 말하면 평균적인 조종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평균을 맹신한다. 평균이란 실체와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평균적이라는 말이 붙으면 왠지 모를 신뢰감이 든다. 우리 사회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이미 전통적인 기준, 평균 등 사람을 개개인이 아닌 군상으로 보는 시각이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모른다. 이 책은 우리에게 평균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히게 된 역사를 조근조근 설명해주고, 구체적인 사례를 다뤄가며 평균적 사고에 오염된 우리의 시각을 객관화해준다. 마지막으로 평균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패러다임-개개인성을 설명한다.
나는 평균이 태초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게 새삼 놀라웠다. 모든 이론은 맨 처음 주창자가 있었을 게 분명하지만, 평균만큼은 여러 사회이론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실감했다. 더구나 이토록 온 사회에 만연한 평균 이론이 한 사람의 천문학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뜨악했다.
책을 중반쯤 읽어나가며 의문이 시작됐다. 평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고 의식하면서도 나는 내 생각에서 평균을 벗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평균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아도 그 끝엔 평균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또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평균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토끼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토끼만 생각난다던가.
이런 독자의 혼란을 내다보았던지 저자는 친절히 대안을 제시해준다. 평균이 가능하려면 같은 기준에 의해 줄세우기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평균의 반대는 평균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개인성이며, 보다 세부적으로는 상황 맥락적 접근이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획일적 기준을 적용하면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내가 내향적인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분명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내향적인 사람으로 단정짓고 나면 때로 답답할 때가 있었다. 나는 공식적인 상황에서는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수다쟁이가 된다. 나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주제에 관해서는 설명하기를 좋아하며 심지어 즐기기도 한다. 아이들 앞에서 수업을 할 때도 신난다. 들쭉날쭉의 법칙을 듣고 나니 나의 답답함이 풀렸다. 나는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거였는데 세상은 우리에게 자주 둘 중 하나를 요구한다. 가장 편하니까.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나는 열여덟 인생 최고의 고비를 맞았었다. 수학 성적이 떨어지더니 오를 기미가 안 보였다. 지독한 슬럼프를 겪으며 열등감에 시달렸다. 오며가며 마주칠 때 내가 심란해 보이셨는지 문학선생님께서 어느 날 나를 호출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열등감은 우월감과 같은 거야. 내가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월감이 있기 때문에 지금 열등감을 느끼는 거야. 짧지만 통찰력 있는 선생님의 말씀은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구출해주었다. 평균의 시대에서 평균 이상의 사람은 과연 행복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의 시대에서 ‘덕’을 보며 살아온 죄스러운 시간을 되짚어본다. 나는 네 살 때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 그때부터였겠다. 자라는 과정 내내 나는 좋은 의미의 관심군이었다. 늘 기대를 받았고, 또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성장해왔다. 관심의 시작점으로 시간을 돌려본다. 아무도 내게 기대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나는 과연 그렇게 노력했을까.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해도 나는 내 삶을 긍정하며 밝게 살아올 수 있었을까. 부끄럽게도 이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평균이란 잣대를 짊어지고 살아가지만 어느 누구도 평균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사회에서 얼마나 용기가 있어야 평균을 등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여섯 살 딸아이의 미래를 그려본다. 이 아이가 누군가를 이기며 살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하지도 비교되지도 않고 그저 이 아이의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함께 성장하면 좋겠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그중에 최고가 되려 애쓰는 게 아니라 각 사람의 모습을 존중하고 어우러져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가면 좋겠다. 내 아이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 한 사람의 어른일 뿐이지만, 온 마음을 다해, 감히.
201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