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균형잡기
나는 말 잘듣는 아이였고, 어른들은 열심히 하라고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그 결과 나는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가정이 건강했으면 좋겠고, 그 안에서 마음껏 행복했으면 좋겠다. 교사 이전에 그저 한 사람으로서 나의 가장 큰 바람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이들의 두번째 어른인 교사로서의 내가 그 아이를 지지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러고 싶었다. 생각건대 그러기 위해선 그 아이가 슬픔이나 아픔을 내게 털어놓을 수 있게 해주어야 했다. 아이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을 그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선 그보다 수없이 많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여러 이야기를 하다보니 속 얘기까지도 할 수 있는 관계가 아이와 나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우리 사이에 그 관계를 만들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관계도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하고 만들어질 순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시간을 쏟았다. 학교에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거의 다 쏟아부었다. 아침에는 일대일로 안부를 묻는 간단한 대화를 모두와 나눴고, 점심시간에는 하루씩 돌아가며 일대일로 만나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쏟은 시간과 노력에 보상을 기대했는가. 아닌 것 같다. 다만 나는 혹여나, 내가 이런 노력을 소홀히 하는 사이 가정 안에서 안정을 얻지 못하는 아이가 그 다음 어른인 나에게서조차 조금의 위안도 얻지 못할까봐 그것이 불안하고 염려되었던 것 같다.
수업에도 욕심이 있다. 나는 훌륭한 언변도 능수능란하게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없다. 그러나 아이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밀착된 수업, 삶이 되는 앎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래서 고민한다. 고민을 바탕으로 하루의 수업을 구성한다. 구성한 수업에 필요한 도구들을 제작한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간단히 시연한다. 글로는 고작 두줄이지만, 빼어난 능력이 없는 나에게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교사의 '업무'들 사이에서 잃지 않고 지켜내느라 하루 온 종일을 분투하는 과정이다.
열심히 사는 교사, 그건 인정해준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다 쏟고 집에 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기력이 없다. 키도 작고 빼빼 말라 쓰러질 것 같다는 얘길 듣는 내가 학교에서 이만큼을 하는 건 이미 오버페이스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몰랐다. 그렇게 그저 열심히 하는 게 제일인 줄 알았다.
지난 주 누군가와의 만남이 본의 아니게 나의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매일 퇴근시간이 점점 늦어지더니 급기야 학교 문을 잠그고 퇴근하는 워킹맘, 교사로서의 삶을 긍정하지만 힘에 부쳐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를 생각하고 있는 내가 건강한 것 같지 않았다. 내 아이들도 돌아보게 됐다. 어느 샌가 겨우 얼굴만 보고 잠 재워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내 삶에 균형을 찾겠다는 다짐을, 어렴풋하게나마 두어 달 전쯤에도 했었나보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남편한테 수요일, 일요일은 아이들을 재워달라고 했다. 그 시간이라도 내 시간을 좀 갖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게다. 아이들에게 딱히 해주는 것 없어도 막상 또 내 시간은 없는 게 엄마의 일상이니까. 아이들은 울고 불고 엄마랑 자겠다고 했다. 아마 그 때도 이미 많이 지쳐있었는지, 끝내 그냥 모른 척 했다. 울음 소리가 길어져도. 그럴만큼 나만의 시간이 간절했었나보다.
오늘, 다시 수요일이다.
씻고 잘 준비하자고, 오늘은 아빠가 재워주는 날이라고 말해주었다. 첫째가, 오늘은 아빠가 우리 재워주는 날이네. 엄마, 잘자요 하고 생긋 웃으며 방으로 들어간다. 세상 쿨하다. 방으로 가려는 아이를 이번엔 내가 오히려 불러세워 안아주고 잘자라고 토닥여 들여보냈다.
경계는 진작 필요했었나보다. '수요일, 일요일은 아빠가 재워주는 날'이라는 작은 경계가 나와 너의 관계를 건강하게 해주었다.
이제 나는 무너진 내 삶을 잘 도닥여 적절한 지점에 경계를 세울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사람들과 건강히 지내며, 내 삶을 잘 가꾸어 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성장할 것을 믿는다.
2020.7.8.